오전 10시, 고주원과 놀이공원에서 '스타데이트'가 있다는 스케줄을 통보받았다. 나는 부랴부랴 준비하고 나섰다. 내 모습이 신문에 함께 실린다기에 선배들로부터 급조한 화장품으로 살짝 모양새를 내고 놀이공원으로 향하는데 치렁치렁한 긴 코트가 영 불편하다.
드디어 놀이공원 입구에서 고주원을 만났다. 평소 브라운관에서 말끔한 양복에 넥타이를 맨 모습만 보다가 검은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의 모습은 달라보였다. 전에 인터뷰도 했었고 몇 번 얼핏 본 적도 있지만 놀이공원에서 만나니 반갑긴 반갑다.
하지만 예상했던 우려가 현실로 닥쳤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고주원과의 데이트는 역시 어려웠다. 고주원을 보고 사진찍으러 몰려드는 팬들로 인해 얼떨결에 일일 매니저가 돼버린 나. 역시 멋진 남자와의 놀이공원 데이트는 내겐 그저 꿈일뿐이다.
나는 놀이공원에 가면 꼭 갖고싶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솜사탕과 풍선, 머리띠다. 고주원은 친절하게도 내게 머리띠를 골라줬다. 자신은 도깨비 뿔을 쓰고 방망이를 들었다. 고주원은 이미 '별난여자 별난남자'에서 동물 그림있는 모자를 쓰고 놀이공원에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취향이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사진기자의 호령과 함께 "김~~치"하며 친한 척 하는데 고주원이 얼굴을 뒤로 빼는 듯한 기분. "얼굴 뒤로 빼지마요"(김겨울) "안 뺐는데요"(고주원) 약간 신경전을 벌였다.
"놀이공원은 많이 와봤나요?" (김겨울) "아뇨.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에서 단체로 오고 꽤 오랜만이죠"(김겨울) "그럼 여자친구랑 데이트는 주로 뭘해요?"(김겨울) "영화를 보러다니거나 맛있는 거 먹으러 다녔죠. 근데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안나요"(고주원) 전에 인터뷰할 때 고주원이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난다. 크리스마스때 잠만 잤다는 고주원이 어쩐지 처량타.
"놀이기구는 무서워하나요?"(김겨울) "아뇨.얼마 전에 번지점프 비슷한 것도 해봤고 전 스릴을 즐기는 편이예요"(고주원) "그래요?"(김겨울) 갑자기 눈을 반짝이던 나는 '번지드롭'이라는 놀이기구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 타죠"(김겨울)
'번지드롭'은 약 40미터의 높이에서 바로 떨어지는 놀이기구로 꽤 무섭다. 갑자기 고주원 안색이 변한다. "이거 무서울텐데"(고주원) "네? 잘타신다면서요"(김겨울) 차례가 다가올수록 고주원은 초조해한다. "이런게 더 싫어. 번지점프보다 이게 더 무서운 거예요"(고주원)
이때부터 나는 고주원의 볼멘 투정을 계속 들어야했다. '무슨 남자가 저만한 걸 무서워하나'라는 생각에 난감했다. 어쨌거나 차례는 오고 놀이기구를 타는데 그 무뚝뚝하던 고주원이 내 안전벨트를 챙겨줘서 약간 놀랐다. 하지만 공포는 엄습하고 둘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사진기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겨울씨 주원씨 좀 밝게 웃어봐요"
"네.괜찮아요. 잘 타고 올게요"라며 설정 웃음을 짓는데 갑자기 쑤욱 올라간다. 나 역시도 오랜만에 놀이기구타니 가슴이 철렁했다. 놀이기구가 끝나고 내 다리는 휘청거렸지만 의외로 고주원은 담담하다. 오히려 나를 챙겨주기까지 한다.
"무섭긴 하네요"(김겨울) "거봐요. 내가 무섭다고 했잖아요"(고주원)
고주원의 말투에서 고소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 중에 맨 꼭대기에서 기도하며 벌벌 떠는 고주원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하하하..이 사진은 뭐죠?"(김겨울)
"그나저나 놀이공원 와서 놀기만 했네요. 인터뷰 좀 하죠. 신인상 받고 어땠어요?"(김겨울) "감사하죠"(고주원) "그러면 부모님이나 지인들 축하는 받았나요?"(김겨울) "네"(고주원)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연신 말이 짧다. "정말 인터뷰하기 힘드네요"(김겨울) "왜요?"(고주원) "이렇게 무뚝뚝한 사람 처음이네요"(김겨울) "딴 사람들도 그럴걸요"(고주원) "안 그렇던데요"(김겨울) "원래 제가 말이 별로 없어요. 친해지면 장난도 치고 그런데 친해지기도 어려운 성격이고요"(고주원)
조금 말이 길어진 듯한 고주원의 반응에 기회는 이때가 싶어 좀 더 질문을 해봤다. "그럼 친구들은 많아요?"(김겨울) "연예인 친구들은 별로 없는 편이예요. 대학교 친구들을 비롯해서 동성친구들은 많죠. 저희 집안도 형제에 친구들도 다 남자고 제 주변은 남자밖에 없어요. 그래도 그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노는 거 좋아해요"(고주원)
이때 문득 한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별녀별남' 팬이예요.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요"
일일 매니저를 자청한 난 말려야하나 고민했지만 나이든 아주머니가 손수 펜을 꺼내든 모습을 보고 차마 말리지 못했다. 결국 고주원의 매니저가 "죄송한데 지금 인터뷰 중이라 안됩니다"라고 강하게 말해 아주머니는 아쉬운 듯 뒤로 돌았다.
하지만 고주원이 "괜찮아요. 해드릴게요"라며 웃으며 사인을 해준다. 잘 웃지도 않는 얼음왕자인 그가 웃다니.. 그에게서 예의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석현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별녀별남' 석현이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세요?"(김겨울) "닮은 부분도 있고 안닮은 부분도 있죠. 석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많이 해요"(고주원) "근데 석현이 너무 우유부단해요. 약혼자까지 있는데 다른 여자를 맘에 두질않나"(김겨울) "근데 그건 석현이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석현이는 어머니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거든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만 하고 살다보니 아무래도 우유부단할 수 밖에 없죠"(고주원)
말이 별로 없는 그가 석현이에 대해 열띤 변론을 하는 모습에 순간 위축됐다.
"그럼 본인도 그런 편이세요?"(김겨울) "아뇨. 실제의 저라면 제 생각이 중요하죠.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제 의견을 많이 믿어주시는 편이죠"(고주원) "그나저나 크리스마스 후부터 계속 쉼없이 일했다면서요?"(김겨울) "그러게요. 촬영일정이 계속 있다보니까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어요. 사실 지금도 많이 피곤해요"(고주원)
벌겋게 충혈된 눈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포즈를 취하며 촬영하는 그를 보면서 프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할 때 고주원과의 스타데이트를 마감해야 했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든다. 무뚝뚝한 말투와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스타데이트 도중에도 몇번이나 전화로 어머니를 챙기는 자상한 모습. 놀이기구 안전벨트까지 챙겨주는 살뜰한 모습. 솜사탕을 정말 맛있게 먹는 고주원을 보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까지.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은 바로 이런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