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의 액션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이스턴 프라미스'의 욕탕 격투신(사진)이 떠오른다. 극중 비고 모텐슨과 그를 암살하려는 두 명의 마피아가 목욕탕에서 처절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인데, 몸 전체에 종교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신으로 도배한 비고 모텐슨이 완전한 나신으로 적들과 싸운다.
음산한 사우나 습기가 가득한 욕탕에서 견고한 돌벽 아래 싸우는 그의 모습은 딱딱한 돌의 질감과 맞물려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물기 묻은 몸으로 거친 숨소리만을 주고받는 대결, 그리고 특별한 무기 없이 맨몸으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달려드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짐승들의 대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흥분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싸움에 임하는 비고 모텐슨의 표정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비고 모텐슨을 보며 떠오르는 사람은 '007' 시리즈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와 더불어, 좀 이상하고 비약적인 생각이지만 러시아의 푸틴 총리다. 그들은 정말 거친 비유나마 ‘동구권 마초의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보수적인 턱선, 그리고 마초적인 눈빛으로 직감적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비고 모텐슨에게 맨 처음 실망감을 안겨준 기억은 바로 '플래툰'(1986)이었다. 나중에 윌렘 데포가 최종적으로 캐스팅된 엘리어스 상사 역을 준비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으나(월남전과 관련된 모든 책과 다큐멘터리를 섭렵했을 정도로) 결국 캐스팅 최종 단계에서 탈락했던 것. 이후 그는 마음을 비우게 됐고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늘 가족에 충실하고 큰 욕심 내지 않으며 어떤 역할이라도 자신의 몸에 꼭 맞게 조율하는 솜씨는 ‘그 날 이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는 '반지의 제왕'(2001) 시리즈의 ‘아라곤’ 역할로 일약 스타가 됐다. 그때가 이미 40대 초반이었으니(1958년생) 무명 생활이 참 길었다. 덴마크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텐슨은 부친의 사업 때문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유년기를 보냈고 그런 ‘유목민’의 삶은 그의 연기에 깊이를 더한 것 같다.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운데 뉴욕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드디어 해리슨 포드 주연 '위트니스'(1985)에서 농부 역할로 데뷔했다.
가장 처음 그 존재감을 알린 작품은 '크림슨 타이드'(1995)였고, 'G.I. 제인'(1997)에서 데미 무어를 괴롭히는 엄한 교관 역할도 인상적이었다. 역시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강하고 무서운’ 배우였다. 그렇게 다작 욕심 없이 꾸준히 출연하는 가운데 조연 그 이상으로 발돋움할 기회는 드물었지만, 함께 한 감독과 동료 배우들로부터 언제나 좋은 평가를 얻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할을 맡을 배우는 원래 스튜어트 타운젠드였지만 피터 잭슨 감독은 그가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고, 주변을 수소문하던 가운데 비고 모텐슨이라는 배우를 추천받았던 것.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스턴 프라미스'에 앞서 만든 '폭력의 역사'(2005)에서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현재의 가정에 충실한 모습도 굉장히 소름끼치는 이미지였다. 언제나 얌전하다가도 가족이든 어떤 가치건 간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 내면의 마초적 야성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였다.
아마도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 극점이라 할 것이다. 분명 자신이 지닌 힘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마초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보는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 믿음직한 남자의 그것이다. 더불어 그가 배우뿐 아니라 화가, 시인, 사진가, 가수로서 다재다능하게 활동하는 배우라는 사실도 왠지 더 그를 ‘있어 보이게’ 만든다. 어느덧 그도 이제 쉰 살이다. 그의 눈빛에는 더 깊은 연륜이 쌓여가고 있다.
<주성철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