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의 해변에서 이창동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시'가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지난해 심사위원으로 온 데 이어 또 다시 칸을 찾았다. |
20일 프랑스 칸의 해변에서 만난 이창동 감독은 약간 우울해보였다. 그는 '시'가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지난해 심사위원에 이어 다시 올해 칸을 찾았다. 국내외 매체에서 '시'를 올해 황금종려상에 유력한 후보로 꼽고 있는 터였다.
그럼에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어둠이 드리웠다. 눈부신 칸의 날씨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시'의 국내 흥행이 그다지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9일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시' 제작자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가 "지금까지 이창동 감독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고전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시'의 리뷰를 쓴 외신들에서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관객과 잘 소통하고 있지 못하다고 적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 관객과 소통하려는 감독에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은 "'시'라는 제목으로 할머니가 시를 쓰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부터 어려움은 예상했었다"면서도 "그럼에도 소통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5번째 영화인데 흥행에 실패한다면 이번이 처음"이라며 "여전히 믿음이 있지만 만일 현실화된다면 누군가에 경제적인 부담을 준다는 게 상당한 충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는 13일 국내 개봉해 첫날 5600명이 들었다. 20일까지 '시'는 6만여명이 극장을 찾았다. 같은 날 개봉한 '하녀'는 이미 100만명이 넘어섰다.
이창동 감독은 "투자자에 손해를 주면서 영화를 만들 자격이 자동적으로 감독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어쩌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드러냈다.
이창동 감독은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있다. 최소 자본으로 소수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를 만들거나 소통을 포기하고 관객과 만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은 선수들끼리만 이해하는 전자의 방식은 자신에겐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번 영화제에 '하하하'로 초청받은 홍상수 감독 같은 독립군 같은 방식은 능력을 떠나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창동 감독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든 관객을 다 포함해도 내 영화보다 적다"면서 "그건 영화의 좋고 나쁨을 떠나 어떤 영화를 만드냐는 방식의 차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렇다고 소통을 포기한 채 많은 관객과 만날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만들 수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이창동 감독은 "그정도로 회의에 빠져있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시'의 주인공 윤정희는 이창동 감독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가 출연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감독님 영화 중 최고"라면서 "결코 어렵지 않은 영화인데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는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서 "그런데 극장을 잘안온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황금종려상에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것으로 옮겼다. 이창동 감독은 "저는 황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종려는 좋다"고 농을 쳤다. "원래부터 경쟁이 싫었다"는 그는 "안되면 쪽팔리고 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고 했다.
ⓒ20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의 해변에 위치한 영진위 부스에 '시'의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가 국내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창동 감독은 "상은 큰 의미가 없다"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밀양'으로 왔을 때 니스의 한 일간지가 전도연의 사진을 소개하며 여배우도 지루해서 졸고 있다고 썼었다며 이번에는 '시'를 가슴의 종려상이라고 전했다고 했다. 이창동 감독은 "만일 그런 상이 있다면 그걸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 중 탄다면 어떤 게 좋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창동 감독은 옆에 윤정희가 있음에도 "이왕 탈거면 황금종려상이 좋죠"라고 말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이에 윤정희는 "그건 당연하죠"라면서 "여우주연상은 한명만 좋은 것이지만 황금종려상은 모두에게 큰 선물이 아니냐"며 정색하게 말했다. 윤정희는 "이창동 감독에게 2년 전 영화출연 제의를 받은 게 배우인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 "이라고 했다.
그녀는 "난 이번 영화로 연기활동을 그만할 게 아니니깐 또 기회가 있을 것"이라면서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또 출연시켜 주겠죠"라며 웃었다. 이창동 감독이 "선생님이 먼저 타시고 저는 나중에 타면 안될까요"라고 하면서 다시 분위기는 밝아졌다.
윤정희는 "송강호와 전도연 등 이창동 감독과 같이 작품을 한 후배들과 식사를 했는데 '우리한테는 지독했는데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잘해주셨다'고 했다"면서 "나는 이번 작업이 정말 좋았다"고 추켜세웠다. 그러자 이창동 감독은 "오케이 소리만 좀 더 크게 했을 뿐이지 끝까지 끌어내려는 방식은 똑같았다"고 정정했다. 그러면서 "제가 지독하다는 게 이 자리의 주제냐"고 해 주위를 또 다시 폭소케 했다.
이창동 감독은 마치 발밑에 눈에 안보이는 물길이 연결되어 있듯이 "일상의 삶이 남과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시'는 개인의 이야기면서 집단의 공통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소설을 쓸 때부터 작가의 의도를 밝히면 안된다고 배웠다는 그가 영화에 대해 설명한 몇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는 일본에서 TV를 보다가 '시'라는 제목과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당시 동행했던 시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작은 성공하더니 오만해졌다"면서 "그런 이야기로 영화를 하면 누가 보겠냐고 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래서 더욱 오기를 갖고 소통할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밀양'을 찍을 때 당시 그곳에서 벌어졌던 실제 성폭행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도 더했다. 이창동 감독은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구원을 이야기해야 하냐면서 당시 '밀양' 준비를 잠시 미뤘다"는 일화도 전했다.
이창동 감독은 '시'에서 주인공 할머니가 손자가 친구들과 성폭행해 결국 자살한 소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대속하려는 데 대해 "이런 사건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말했다.
'대속'이란 종교적인 의미가 '밀양'과 이어지는 데 대해 이창동 감독은 "청소년의 죄는 당연히 어른이 대속해야 한다"면서 "종교적인 의미만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면 그 속에 종교는 담겨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잠시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이야기는 '와인글라스'라는 영화 속 미자(윤정희)가 부르는 노래로 옮겨갔다. 이 노래는 19일 레드카펫 행사 때 '시' 주인공들 위로 흘렀다.
이창동 감독은 "이 노래는 회한과 이별, 이런 많은 것을 담고 있다"면서 "우연히 들었지만 기막히게 영화와 어울렸다"고 했다. 그러자 윤정희는 "이 노래가 마치 영화 속 미자의 과거와 똑같을 것"이라며 "너무 절묘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창동 감독은 "젊었을 때 남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 같다는 소리죠"라고 하자 윤정희는 "응"이라고 말해 칸의 해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