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는 조용히 연말을 준비하는 영화들이 있다. 몇몇 영화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으나 흥행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던 작품들이다. 이대로 지나치기에는 안타까운 몇 편의 영화들을 되짚어본다.
◆내 깡패같은 애인
88만원 세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러나 과장되지 않게 그려낸 '내 깡패같은 애인'(감독 김광식)은 조용히 찾아온 단비같은 작품이었다. 되는 것 하나 없다고 느끼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보내는 따듯한 위로라고나 할까.
어쩌다 옆집에 살게 된 실직녀와 한물 간 깡패가 나누는 우정과 사랑이 유쾌하고도 잔잔하게 담겼다. '누가 진짜 임페리얼 맛을 안다고 그래' 같은 착착 붙는 생활 밀착형 대사도 일품이다.
거칠지만 귀여운, 몸에 꼭 맞는 캐릭터를 입은 박중훈과 씩씩한 88세대를 그대로 투영한 아가씨로 분한 정유미의 모습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당당히 각본상을 거머쥐었고, 올해 영화제에서 무려 4개의 작품상과 4개의 감독상을 독식했지만, 정작 이 영화와 함께한 이들은 불과 22만명 정도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다.
시 쓰기를 배우는 소녀같은 할머니가 알게 된 끔찍한 현실은 결코 시처럼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과 아픔을 참아내며 결국 한 줄 한 줄 시를 써내려간다.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여백으로 가득한 '시'는 그렇게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시'는 1960년대 최고 여배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만무방' 이후 16년만에 돌아온 배우 윤정희는 66살의 할머니 미자로 살아 숨쉬는 연기를 펼쳤다.
◆맨발의 꿈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단을 만들어 세게 축구 무대에 내보낸 어느 한국인 감독의 영화같은 이야기가 그대로 영화가 됐다. 감동 실화, '맨발의 꿈'(감독 김태균)이다.
코묻은 돈이나 벌어볼 요량으로 아직 내전이 한창인 동티모르로 간 주인공. 축구화와 축구공 대여사업을 위해 벌였던 일이 점점 커간다. 그가 만든 어린이 축구단이 우여곡절 끝에 국제대회까지 참가하게 된다.
동티포르 1호 배우가 됐다는 영화 속 어린이들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들. 그러나 그 깜찍한 모습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박휘순, 고창석의 존재감도 일품.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새 소리 내 그들을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8번의 감정
남자란 이런 대책없는 동물이다. 성지혜 감독의 영화 '8번의 감정'은 그렇게 말한다.
100%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게 아니라면? 이라는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하는 '8번의 감정'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사랑을 시작하고 불탔다가 식고 또 다른 것을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는다.
군데군데 위트가 가득하다.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 형식을 빌려 수컷이라는 동물의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은 그 가운데서도 백미. 능청스럽게 남자의 속살을 까발린 김영호 또한 일품이다.
이들 영화 외에도 보다 관객의 호응이 다소 아쉬웠던 작품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악마를 보았다'다.
180만 넘는 관객을 모은 이 작품이 관객 동원에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잔혹성 논란에 가려져 그 진면목이 과소평가된 점은 다소 아쉽다. 영화 내내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극한을 향해 달리는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최근작 가운데서도 특히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