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홍봉진 기자 |
"실제 조여정의 연애사를 다시 머릿속에서 정리하게 한 작품이에요.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10년 정도의 경험이 필름처럼 떠올랐어요. 까먹었던 것도 다 생각났고요. 제 연애를 총망라했다고 볼 수 있죠."
케이블채널 tvN '로맨스가 필요해'(극본 정현정 연출 이창한)는 한국 로맨틱코미디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작품이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진부함, 연애의 판타지가 주는 생경함, 적나라한 현실이 배제된 비현실적 순수성. '로맨스가 필요해'는 이 모두를 버리고, 드라마 대신 현실을 선택했다.
선우인영은 끝내 왕자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않았다. 순정을 되새기며 두 번이나 바람을 핀 옛 애인의 품에 안기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삶을 택했다. 선우인영으로서의 치열한 삶을 택했다. 14부 마지막에 했던 "난 나를 제일 사랑해"라는 말이 무색치 않을 만큼 선우인영은 현실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배성현파와 김성수파 모두를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더 큰 울림을 전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아직 선우인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니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조여정을 만났다.
평소 '로맨스가 필요해'의 광팬인지라, 기자로서의 신분도 잊고 팬심에 담뿍 젖어 이야기를 이끌었다. 인터뷰라기보다 '로맨스가 필요해'의 두 폐인이 나눈 수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배성현(최진혁 분)이 재벌2세가 아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네티즌 중에서도 차라리 재벌이 아니었다면 선우인영과 잘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분이 많던데요. 사실 신데렐라 스토리 자체가 안 맞는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웬만하면 재벌 설정을 피해보자고 감독님도 얘기했는데 결론은 10년 사랑을 흔들 만큼 큰 게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재벌가처럼 온도 차이를 주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만약 비슷한 수준의 남자였으면 김정훈에게 돌아갈 여지가 너무 크니까요. 너무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거죠.
-14회 마지막에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 된다"라고 배성현의 프로포즈를 거절할 때 "김성수"라고 할까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행히 "선우인영"이라고 했긴 하지만요. 그 대답을 하기 직전까지도 선우인영이 거절할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보이고 싶었어요. 그전부터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끝까지 결정을 못하다가 그냥 순간 그런 생각이 든 것처럼요. 재벌가 파티에서의 내 모습과 고객들에게 서비스로 응대하는 내 모습이 비교되면서 자연스럽게 거절이 된 거죠.
-첫 로맨틱코미디신데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케이블드라마라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일하는 여자로서 사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사는 거랑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래서 매 장면 다 절절히 느끼면서 찍었어요. 케이블드라마라는 부담은 정말 없었어요. 대본 보고 내레이션과 대사가 너무 좋아서, 좋은 작품이니까 자신 있었죠. 스스로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지금 여자들이 원하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슈가 안 돼도 알음알음 보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떤 분이 트위터로 "월요병 두렵지만 '로필' 하니까 기분 좋다"라고 보내주신 코멘트가 제일 기분 좋았어요. 결국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통쾌해요.
조여정ⓒ홍봉진 기자 |
-실제로는 선우인영, 강현주, 박서연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한가요? 세 분 정말 친하실 것 같아요.
▶제 안에 세 명의 성격이 다 있는 것 같아요. 말도 안되게 엉뚱하고 허당 같은 현주 같은 면이 있고, 웃기고 망가지는 인영이도 있고 쿨한 서연이도 있고요. 세 캐릭터 다 너무 좋았어요. 셋이 만나는 신 찍을 땐 정말 얘기 많이 해요. 제가 상대적으로 신이 많아서 챙기지 못한 게 미안하죠. 지금 여진이가 29, 송현이가 30, 제가 31인데 지금 만난 게 이유가 있어요. 다 한번씩 겪어본 감정들에 대해 연기하니 화두가 정말 많았어요. 둘 다 너무 좋고, 가슴이 따뜻한 친구들이에요.
-처음 김정훈이 상대역으로 캐스팅됐다고 들었을 때 어땠나요? 조여정씨가 보기에 김정훈은 어떤 배우 같나요?
▶어떻겠다는 예상도 못하고 시작했는데 재발견했어요. 꽃미남 외모와 달리 의외로 코미디 코드가 있더라고요. 뒤로 갈수록 생각지 못한 모습을 찾을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저 꽃미남이 어떻게 하려나 했는데 너무 잘 하더라고요. 근데 성수가 은근히 찌질한 캐릭터가 있어서 오빠가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서 제가 "배우할거면 찌질이도 멋있는 것"이라고 위로 했죠. 생활에서 묻어나는 아저씨 같은 면, 그게 배우라고요. 편하고 생활을 같이할 수 있는 남자여야 하니까 인영이 선택한 거잖아요. 대사 맞추다보니 과장된 애정표현도 나오고, 그런 게 재미였어요. 스킨십도 되게 많은데 희한하게 하나도 안 창피했어요. 오빤 아저씨처럼 "가글했다잉"하면서 넉살도 떨었죠. 그래서 10년차 연인의 일상 같은 스킨십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쫑파티 때 서로 재발견했다고 말했으니, 좋은 거죠.
-사실 이해가 안 되는 장면도 많았어요. 강희(하연주 분)가 성수 집에 왔는데도 스파게티를 만들어 같이 먹는다거나, 성수와 헤어진 뒤 넷이서 저녁을 먹는데 무의식적으로 성수 옆에 앉았던 장면 같은 거요. 공감하셨나요?
▶막 달려들어서 100% 이해한 다음에 연기하는 건 무리였어요. 드라마니까 그런 장면도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훈오빠도 보수적인 편이라 바람피거나 하는 장면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그랬어요. 그렇게 따지면 작가가 왜 있겠냐고. 우리가 하는 고민을 작가분이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요. 레스토랑 신도 그렇게 말이 안되는 선우인영의 행동까지 성현(최진혁 분)이 받아주니까, 인영이가 성현의 진심을 느끼는 계기가 되잖아요. 말도 안 되는 대본을 가장 그럴듯하게, 이해되게 만드는 게 배우의 역할인 것 같아요.
-벌써 10년차 배우인데, 스트레스는 없으세요?
▶처음엔 혼자 좋아서 연기를 하다가 경력이 쌓이면서 비교당하는 위치가 되니까 스트레스가 오는 것 같아요. 이 정도 됐으면 제 욕심에 어디쯤 있어야 될 것 같은데 하는 욕심이 드는 거죠. 다른 배우들에 비해 처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욕심 없이 그냥 즐기는 것도 좀 그렇고, 즐기면서 하는 데 그 결과가 욕심에 따라올 수 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로맨스가 필요해'가 잘 돼서 통쾌해요.
-공감가는 대사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 있으세요?
▶마지막 회에 나오는 대사인데 "여자의 맘에 방이 여러 개가 있다"라는 게 기억에 남네요. '성현이 주고 간 사랑은 어느 맘 방 안에 넣어놓고 간직하겠다'라고 하는 거요. 여러 명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들어왔을 때 꽉 차도 여러 개 방 안에 다른 사람의 공간은 남아있는 것 같아요. 어떤 책에서 "남자의 방은 여러 개고, 여자의 방은 하나"라고 했는데 이해 안돼요. 여자도 방이 여러 개인 것 같아요. 웃긴 대사 중에선 그 레스토랑 신에서 성수에게 화낼 때 "헌신하다 헌 신 됐잖아"라고 한 게 정말 재밌었어요.
-실제 선우인영이라면 누굴 택했을까요?
▶전 성수요. 조여정은 성수에요. 인영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온도가 다르면 못 살 것 같아요. 사랑해준다고 극복이 되는 게 아니니까요. 아닌 걸 견뎌낸다는 면이 현실적으로 들어가면 가족들과 부딪히고 내 문화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편견이 생기거든요. 극중에서도 성현은 제가 이름도, 직업도 버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잖아요. 못돼서가 아니라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게 결정적으로 성현을 선택하지 못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인영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이세요?
▶처음에 작가님이 어떤 연애했냐고 물어봤을 때 "전 절 제일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남자한테 막 매달린 적도 없어요. 남자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더라고요. 제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런 사람이에요. 작가님이랑 그 얘기하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났는데 14부 대본 마지막 대사에 "난 날 사랑해"라는 게 있었는데, 속으로 '나잖아 조여정, 이게 나야'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여자분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정말 많이 몰입하셨을 것 같은데 마지막 촬영 때 소감이 어떠셨어요?
▶영동의 시골집에서 마지막 촬영했어요. 정훈오빠랑 막 울다 끝났어요. 끝나니까 진 빠지더라고요. 차분하게 끝난 것 같아요. 한 번씩 안아줬어요. 마지막 방송분까지 봐야 정말 끝난 게 실감날 것 같아요.
-결혼 생각은 없으세요? 최송현씨는 이 작품하면서 결혼 생각이 사라지셨다고 하던데.
▶하하. 재밌다. 재밌네요. 저는 결혼에 대한 화두가 아예 없어졌어요.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예 머릿속에 없어요.
-다음 작품은 어떤 것 하고 싶으세요? 시즌2가 나오면 출연하실 거죠? 그러셔야 돼요.
▶달달한 거 한번 했으니까 다른 장르 해볼까 해요. 연기자로서 릴렉스한 작품을 하는 데 공을 들였으니 이제 텐션 있게 잡아서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어요. 시즌2 나오면 해야죠. 스케줄만 맞으면 하고 싶어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옆자리 여성이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로맨스가 필요해'를 본다. '로필 폐인' 중 한 사람으로서, 뿌듯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3인치짜리 화면을 통해 보이는 조여정은 영락없는 선우인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