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혁 ⓒ사진=임성균 기자 |
대학 입시에서 113번 떨어졌다면. 회사 면접에서 113번 떨어졌다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그 일을 하겠다고 돌아다닐 수 있을까?
장혁은 그랬다. 스무 살, 아무 것도 모를 때 SBS 드라마 '모델'로 데뷔했다. 그리고 오디션을 숱하게 떨어졌다. 세본 것만 100번이 넘었다. IMF 시절 아버지가 퇴직했다. 장남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죽어라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114번째 오디션에 합격했다. 배우 장혁은 그렇게 탄생했다.
'도가니'에 이어 박스오피스를 달구고 있는 '의뢰인'(감독 손영성, 제작 청년필름)은 장혁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장혁은 이 작품에서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는 남편으로 등장한다. 표정도 없고, 액션도 없다. 지금까지 장혁이 지르는 듯한, 몸 전체로 연기를 하는 배우였다면 '의뢰인'에선 안으로 갈무리하듯 연기한다. 에너지를 안으로 담아놓고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배웠다.
15년째 연기하고 있는 장혁은 그렇게 또 다른 114번째 오디션을 관객 앞에서 봤다.
-'의뢰인'은 변호사 역의 하정우가 리드하고 검사 역의 박희순이 중심을 잡는 영화다. 원래 용의자 역은 희미하다시피 한 배역이었는데. 그래도 선택한 이유는.
▶배우 생활한지 15년 정도 지났는데 저 사람은 주연만 해야 돼 이런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 그 배역에 포인트가 있었다. '라쇼몽' 같은 느낌이랄까? 변호사와 검사가 이끌지만 그 두 사람이 이 남자에 대해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그동안 액션을 많이 하는 배우였는데 반대 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 버전에서 15분 정도 편집된 게 현재 상영 버전이다. 극 중 배역에 대한 설명이 삭제됐는데 아쉽지 않나.
▶물론 그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부분이었다. 왜 하정우에게 의뢰를 했는지도 담겨있으니깐. 하지만 편집 권한은 감독의 몫이고, 지금 버전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액션 연기가 아니더라도 몸 전체로 표현하는 듯한 연기를 해왔다면 이번엔 얼굴로 연기를 하던데.
▶그동안 투수의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포수의 입장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리액션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입장. 나는 오래 연기를 하고 싶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얼마 전 고창석 선배를 만났는데 그 분은 천만 배우다. 누적된 게 천만이다. 천만명이 고창석의 각기 다른 포인트를 본 것이다. 얼마나 배우로서 관객들이 다른 부분을 봤고, 넓게 봤겠나.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오래 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작은 역인데 '의뢰인'을 했냐고 많이 묻는데 내 대답은 오래 할 수 있으려면 비중이 크든 작든 다양한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정우와 주로 주고받았는데 둘의 앙상블은 현장에서 어땠나.
▶(라이터를 세우며)앙상블이란 게 꼭 이렇게 가운데로 세워져야한 앙상블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체가 10이라면 상대가 7를 표현할 때 난 3를 해내는 게 앙상블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4나 5를 하면 그건 앙상블이 아니다. 하정우와도 그렇게 했다. 서로 준비를 했겠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면 수학공식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 현장에서 그런 부분을 맞추면서 했다.
배우 장혁 ⓒ사진=임성균 기자 |
-용의자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처음에는 캐릭터에 대해 거창하게 생각했다. 관련된 책도 많이 읽었지만 정답은 없었다. 똑같은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았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변호사를 가지고 놀면서 검사랑 체스를 두는...하지만 디렉션이 있었고 그게 더 중요했다.
-전역 후 드라마에선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영화에선 본격적인 상업영화는 '의뢰인'이 처음인 것 같은데.
▶다 상업영화라고 한 것이다. 관객에 대한 낚시가 있으면 그건 상업영화라고 생각한다.
-의리를 늘 지키며 산다. 현 소속사 대표와도 15년이 넘는 동안 늘 의리를 지켜왔다. 그래서 손해보는 것도 많은데.
▶안에서 보는 시각과 밖에서 보는 시각이 다른 것 같다. 처음에 내가 오디션을 보러 다녔을 때 소속사 대표에게 사람들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고들 했다. 그래도 끝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줬다. 내가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설득됐고, 납득했다. 그리곤 지나간 일이다.
-'시크릿 가든'을 원해 하려 했는데 소속사 사정 때문에 못하게 됐다. 아쉽지 않나.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았다'고 한 마디했다. 그리고 끝이다.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왕의 남자' 때문일 것이다. 당시 '왕의 남자'를 하다가 군대에 가게 됐다. 군대에서 아쉬움과 안도감을 느꼈다. 사람인지라 아쉬움이 있었고, 내가 피해를 줬는데 잘 되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하지 못한 작품에 아쉬움은 없다. 내 프로필에 '왕의 남자'를 할 뻔한 배우, '시크릿 가든'을 할 뻔한 배우, 이렇게 남는 것은 아니지 않나.
또 군대에 있으면서 배우 장혁이 아닌 정용준을 되찾았다. 배우가 되기 전 난 시청자고 관객이었다. 배우를 하면서 어느새 그런 관점을 잃어버렸다. 그걸 여러 사람과 같이 지내면서 새롭게 배웠다. 그래서 투수 뿐 아니라 포수 입장으로 설 수 있었다.
-113번 오디션을 떨어졌는데 어떻게 포기하지 않았나.
▶절실하고 무지했으니깐. 배우라고 하기도 뭐한 의지도 없던 20살 때 '모델'로 데뷔했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목적성이 없는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길 무렵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제가 뭔지도 몰랐다. IMF 시절 아버지가 퇴사하고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강했다. 할 줄 아는 것도 달리 없고 계속 오디션을 봤다. 그 때 현재 소속사 대표와 항상 같이 다녔다.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 목적성을 갖더라.
그걸 배웠고 내가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목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다. 연기가 늘었다는 게 아니라 생각이 달라졌다.
나를 세일즈한다고 할까, 프로페셔널이다, 란 생각. 내 서비스를 다시 받고 싶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오래하고 싶다. 히트친 걸로 한 순간을 탕진하고 싶지 않다.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로 안방극장에 복귀했는데. '추노'에 이어 또 사극인데.
▶처음에는 안 하려 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아버지에 대한 죽음 때문에 세종대왕을 암살하려다가 결국 그의 뜻을 알게 되는 역이다. 전형적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캐릭터가 점점 눈에 들어오더라. 성군인 줄로만 아는 세종대왕을 죽이려 하는 인물. '추노' 때는 목적도 없이 좀비처럼 사는 인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어제에 사로잡혀 노이로제를 늘 갖고 사는 인물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함께 하는 신세경과 한석규는 어떤가.
▶아직은 잘 모르지만 한석규 선배는 깊이가 있고 또 재미있다. 신세경은 현장에서 굉장히 예의가 바르다. 현장에서 예의가 바르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의 뿐 아니라 카메라 밖에서 리액션을 맞춰준다든지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다. 한 번도 나와 인간적인 기질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배우를 본 적이 없는데 신세경은 왠지 나와 맞을 것 같다.
-중국으로 진출했는데 미국 진출 계획은. '화산고'가 미국 MTV에서 상당히 호평을 받았었는데.
▶운좋게 미국에 가게 된다면 내 역할은 정해져 있다. 액션. 솔직히 액션연기를 잘한다. 어릴적에 내 대역인 스턴트맨이 죽을 뻔 한 위기를 딛고 일어나 해내는 걸 보고 동경도 갖고 있다. 하지만 액션은 연기일 뿐 액션배우가 되고 싶진 않다. 통로가 될 순 있겠지만 현재는 그게 답이다.
-언젠가 나이를 먹고 기성배우가 될텐데.
▶감사하고 열심히 할 것 같다. 오래 하고 싶다. 지금은 내 얼굴을 지워가는 것 같다. 나를 지우다보면 언젠가 드라마를 갖춘 얼굴이 되지 않을까.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
배우 장혁 ⓒ사진=임성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