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1일 참사 당시 칸주루한 경기장의 모습. /AFPBBNews=뉴스1 |
축구 경기장 사고 중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지난 1964년 페루의 경우처럼 지난 1일 인도네시아 칸주루한 경기장도 비슷했다. 페루 참사로 328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도네시아 축구장 참사로 130여 명이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관중들이 많아 사망자 수는 늘어날 수도 있다.
1964년 참극은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도쿄 올림픽 축구 예선전에서 경기 막판 홈팀 페루의 골이 무효처리되자 발생했다. 화가 난 페루 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난입했고 당황한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했다. 관중들은 최루탄을 피하기 위해 출구 근처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출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순간 압사사고가 이어졌다.
페루 참사를 요약한 앞 문장에서 사고 발생연도, 지명, 경기만 바꾸면 인도네시아 참사와 사실상 똑같다. 홈팀 아레마 FC를 응원하던 팬들은 라이벌 팀 페르세바야 수라바야에 패하자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홈에서 23년 만에 수라바야에 당한 첫 패배와 심판판정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루탄이 발사된 뒤 페루의 경우처럼 닫혀진 출구로 도망치다 희생양이 됐다.
![]() |
조코 위도도(왼쪽)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이번 참사의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
인도네시아 참사가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이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4년 전에도 칸주루한 경기장에서는 최루탄이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홈 팬들은 심판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며 경기장에 난입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다. 214명의 관중이 이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한 소년은 사고 발생 후 1주일이 지나 사망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당국은 이 사건을 그냥 덮었다. 축구장에서 최루탄 사용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도네시아가 간과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사실상 예고돼 있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는 경기장 참극을 계기로 축구 문화와 산업을 바꿨다. 33년 전인 1989년 벌어진 힐스버러 참사 때문이었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 경기에서 97명의 팬들은 목숨을 잃었다. 테라스로 불리는 입석에 있었던 관중이 압사사고의 희생자가 됐다. 1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입석 관중석에 약 3000명이 운집하면서 생긴 인재(人災)였다.
당시 영국 경찰당국은 이 사고의 근본 원인을 축구 훌리건으로 몰아갔다. 훌리건을 '영국병(病)'의 하나로 몰아붙였던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수상은 이제 축구 클럽이 카드를 소지한 회원들에게만 경기장 입장을 허가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 |
리버풀의 홈 안필드 축구장에 있는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 명단. /AFPBBNews=뉴스1 |
대신 중산층 팬들이 잉글랜드 축구장을 찾기 시작했다. 전 좌석제로 인해 잉글랜드 프로축구 클럽의 입장수입은 상승했다. 빅 클럽은 티켓 가격을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훨씬 높게 책정해 더 큰 이익을 누렸다. 사라진 테라스로 여윳돈이 많지 않은 노동자 계층이 더 이상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를 경기장에서 관전하기는 힘들어졌지만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효과가 있었던 셈이었다.
힐스버러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재판의 결론은 2016년이 돼서야 나왔다. 원인은 무질서한 팬이 아니라 초동대처에 실패한 경찰의 과실치사라는 게 최종 판결이었다. 당시 경찰은 한 명씩 들어가는 회전 출입구로는 팬들이 경기 시작 전까지 모두 입장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또다른 출입문을 개방하는 실책을 범했다. 이로 인해 테라스에 수용인원을 초과한 팬들이 몰렸다.
힐스버러 참사가 경찰의 오판에서 비롯됐다면 인도네시아 축구장 참사는 4년 전의 아픈 기억을 뒤로한 채 또다시 최루탄을 발사한 경찰의 과잉진압이 주된 이유로 지적된다.
![]() |
이종성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