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0년 전, 세계 최초 축구 클럽은 17세 대학생이 창단했다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4.12.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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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클럽' 창설자 존 호프. /사진=영국 인디펜던트 캡처
FIFA(국제축구연맹)와 FA(잉글랜드축구협회)는 모두 세계 최초의 축구 클럽을 셰필드 FC로 인정하고 있다. 1857년 창단한 셰필드 FC는 1863년 FA에 가입했다. 이 클럽은 현재 잉글랜드 축구 8부리그인 노던 프리미어리그 원에 소속돼 있다.

하지만 최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세계 최초 축구 클럽은 정확히 200년 전인 1824년 12월 11일 창단됐다"고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명칭은 '풋볼 클럽(Foot Ball Club)'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창설됐다.


지난 11일 풋볼 클럽 창설 200주년을 맞아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이 클럽의 창립자는 당시 17세의 나이에 에딘버러 대학 법학과를 다녔던 존 호프(1807~1893)다. 1841년까지 존재했던 이 클럽은 호프의 영향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이 에딘버러 대학 법학과 동문들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탄생한 풋볼 클럽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세계 최초 축구 클럽이라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프가 1833년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세계 최초로 축구 규정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규정 중에는 그라운드에서 손을 사용해 공을 잡아 전진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조항이 주목된다. 19세기 초반까지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행해지던 축구에는 현재의 럭비와 축구의 규정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필드 플레이어들이 모두 손과 발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호프가 만든 축구 규정은 축구와 럭비의 분화를 최초로 나타낸 귀중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풋볼 클럽은 17년 동안 500회 이상의 경기를 치렀으며 이 기간 300여 명의 선수들이 클럽을 거쳐갔다.

클럽 운영은 쉽지 않았다. 우선 상대할 축구 클럽이 부족했기 때문에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풋볼 클럽의 선수들이 주로 두 팀으로 나눠서 뛰어야 했다.

경기에 반드시 필요한 축구 공도 문제였다. 당시 축구 공은 겉은 가죽이었지만 속은 돼지 방광을 사용해 만들었다. 하지만 돼지 방광이 자주 터지는 바람에 한 경기에 서너 번씩 돼지 방광을 공에 바꿔 넣어야 했다.

경기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축구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빈 공간은 주로 경작지 주변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경작지에는 소나 양의 배설물들이 많아 이를 깔끔하고 치우고 축구를 해야 했다. 풋볼 클럽은 심지어 경기 도중 소나 양이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 농부들에게 돈을 주고 가축들의 관리를 부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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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축구 경기 모습. /사진=영국 인디펜던트 캡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풋볼 클럽이 운영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창립자 호프가 축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축구에 열정을 보였던 핵심 이유는 산업혁명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파편화하는 사회적 연대의식과 일부 계층의 일탈과 관련이 컸다.

호프는 축구를 통해 에딘버러는 물론 스코틀랜드 사회가 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출범하게 되는 보이 스카우트나 소년대(Boy's Brigade)와 같은 단체의 전신이 되는 청년단체를 호프가 조직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장로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8세기부터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과도한 음주 문화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인식하고 있던 호프는 금주 운동 주의자가 됐다. 그가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금주 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축구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축구 클럽이 회원들의 건강한 신체를 단련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친목도 다질 수 있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호프에서 시작된 스코틀랜드 축구의 전통은 축구 클럽 창설 붐으로 이어져 적지 않은 스코틀랜드 청년들이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갖추게 되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스코틀랜드 축구 유망주들은 19세기 후반 더 많은 주급을 주는 잉글랜드 축구 클럽에 스카우트되면서 잉글랜드 축구의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1888~1889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서 무패로 우승한 프레스턴 노스 엔드 클럽의 핵심 선수들도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산업적 측면에서 축구의 발전도 스코틀랜드가 이끌었다. 스코틀랜드의 '산업 수도'로 불렸던 글래스고에는 1873년 세계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인 햄던 파크가 건립됐다.

현재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주로 펼쳐지는 햄던 파크가 건립된 이후 잉글랜드에서도 대규모의 축구 전용구장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축구에 열광하는 팬들을 최대한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 건립은 축구 산업화의 시작점이었다.

1909년 스코틀랜드 축구의 최대 라이벌 클럽인 글래스고 셀틱과 글래스고 레인저스의 스코티시 FA컵 결승전에는 무려 13만 명이 넘는 관중이 운집했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대의 프로 축구 리그가 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상업화의 원류는 사실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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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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