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2002년 6월19일 대전 경기장 기억나시죠? 선생님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붉은 악마들은 반갑게 외쳤죠. "오~필승, 이주일! 오~필승, 코리아!" 그때 선생님 눈가에 맺힌 물기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30명 남짓한 이탈리아 응원단 바로 앞에서 태극전사들을 응원했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 선생님은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셨죠.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우리선수들이 밀리는 게 확실해졌을 때 선생님은 그러셨죠. "역시, 이탈리아가 잘 해. 안정환이가 처음에 넣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후반전 43분, 마침내 설기현 선수가 회심의 동점골을 넣었을 때 대전구장은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마구 흔들렸습니다'. 앞 자리에 있던 붉은악마들도 선생님을 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선생님도 비록 휠체어에 앉아계셨지만 마음만은 그라운드로 향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연장전 안정환의 역전골. 선생님은 우셨죠.
그랬습니다. 월드컵. 그해 초부터 일산암센터와 분당 자택을 오가며 그놈의 몹쓸 폐암과 투병하시면서도,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의 마감을 예감하셨으면서도, 선생님은 축구와 월드컵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얼굴이 환해지셨죠. 그러다 프랑스와 세네갈 개막전을 마침내 상암구장에서 봤을 때, 선생님은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죠. "저러다, 프랑스가 지겠는데"라는 선생님의 축구전문가급 혜안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 월드컵이 바로 내일 독일에서 열립니다. "내가 다 나으면 독일로 같이 가서 응원하자"던 그 월드컵 말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신 국가대표팀의 수비불안은 여전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는 믿습니다. 구장에서 본 이탈리아전, 병상에서 본 미국전 때는 없었던 박주영이나 조재진 같은 젊은 선수들이 뭔가를 해낼 것이라고요. 그리고 선생님도 분명히 하늘나라에서 우리 젊은 선수들을 응원해주실 것이라고요.
하지만 왠지 이 들뜬 마음 한 구석이 휑해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요. 독일월드컵, 응원은 뜨겁게 하겠지만 우리는 진정 축구와 태극전사를 사랑하는 걸까요. 종목에 상관없이 오직 국가대항전의 승리와 기쁨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요. "김 기자, 쟤들(태극전사들)이 져도 좋아할 수 있어? 그래야 진짜 축구를 사랑하는 거야"라는 선생님 말씀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선생님의 축구사랑을 듬뿍 담아 독일로 보내고픈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