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의 신작 'M'은 독한 작품이다. 독기는 안개처럼, 악몽처럼 스크린을 배회하는 분위기 자체에서 비롯된다.
감독의 말마따나 'M'은 첫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M'은 첫사랑의 독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한 첫사랑은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놓은, 잊혀지지 않을 “순간”이다. 누구나 다 그 순간들을 지나치지만 누구나 다 그 순간의 덫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이명세가 그려낸 남자, 한민우, 그는 기억의 덫에 걸린 남자로 등장한다.
유명 작가인 한민우는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는 듯한 환상을 경험한다. 환상의 농도는 점점 짙어져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불면증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라는 물리적 상황을 전제로 한민우의 환몽은 점점 심해져만 간다.
환상이 심해질 때마자 그는 '루팽'이라는 이름의 술집에 가게 되고 거기서 잊고 있었던 한 여자, 미미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바로 그의 첫사랑,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해진 순정의 대상이다.
영화 'M'이 독한 사랑 이야기인 것은 한민우가 미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한민우가 미미를 만나게 되는 술집은 음습한 골목 뒤, 나선형의 계단을 한창 내려간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마치 꿈처럼 묘사된 술집 입구나 어둠 속에 단 한줄기 빛으로 표현된 계단,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상하다시피, 술집 루팽은 한민우의 일상이 은닉하고 있는 무의식, 그 깊은 속내를 의미한다.
한민우는 약혼녀가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뒷골목으로 상징되는 의식의 뒤편 그리고 그 속에서도 가장 깊은 진앙에 놓인 감정과 조우하게 된다.
무시무시한 것은 이 남자의 첫사랑이 기억의 대뇌피질이 아니라 무의식 속 실재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되지는 않지만 무의식에 갇혀 나를 움직이는 힘, 남자에게 첫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말이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덫이다'는 명제를 규명하듯 영화 'M'은 무의식에 침잠한 채 남자의 일부가 되어버린 첫사랑을 추적한다. 이발소에서 만나 머리를 감겨주고 해안가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첫사랑”이 어떤 것인 지를 잘 보여준다.
마치 “첫사랑”이라는 단어의 해제를 보여주듯, 그래서 첫사랑이라는 말의 의미 대신 사전에 등록해도 좋을 만큼 선명한 이미지가 이 시퀀스에 녹아 있다. 입술도 마주 닿을 수 없었던 순결한 감정들이 숨죽인 조명과 가려진 그늘 사이에서 발효된다.
첫사랑이라는 덫을 그린 이 작품이 독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마지막 엔딩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결국 한민우는 비극적 사건으로 자신을 떠난 첫사랑과 결별하고 현실의 약혼녀와 결혼을 한다. 그는 추억 속의 한 페이지에 순결한 사랑을 묻고 현실을 함께 할 여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 미미는 더 이상 나이들지도 훼손되지도 않은 채 언제나 19살 소녀로 간직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미의 떠남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무릇 첫사랑이란 기억 속 박제된 모습일 때 더 아름답지 않은가? 20년 만에 서울역 플랫폼에서 만난 그녀가 실망과 안타까움만 불러일으키 듯이 말이다.
한민우, 그 남자는 첫사랑을 박제한 채 살아 숨쉬고 같이 늙어갈 여인을 선택한다. 그는 아마 그녀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며 연금 보험에도 가입할 것이다.
결국 이 영화 'M'은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화인을 버리고 현실의 여인을 맞아 결혼을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마치 결혼 전 모아두었던, 애인들의 사진을 태우듯 한민우는 미미와 화해한다. 다정한 단어들로 채워진 첫사랑과의 해후는 결혼식 전날 곧 태워질 편지를 보며 홀로 눈물짓는 남자들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 다음 날 아침이면 신부를 맞아 환하게 웃겠지만, 그렇게 첫사랑과 과거는 화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다.
남자가 아내를 맞이할 때 그 지독한 화해의 방식, 그것이 바로 'M'이다.
(영화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