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은 우리에게 선물 같은 감독이다.
그의 작품 '당시'가 선보였을 때, 섬뜩한 이질감과 대륙적 기질에 현기증을 느낀 바가 있다. '망종'의 결론이 울음으로도 해소못할 육중한 고통을 준 것도 이와 유사하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분명 대륙적이다. 여기서 '대륙적'이라고 한다면 서사적이라는 말과 바꿀 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서정적인 인물과 서사적인 인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나이를 먹고 나면 서사적인 인물로 바뀌게 된다. 이야기가 확장되듯 그렇게 사람도 넓어진다. 장률을 보면 과연 서사적인 인물이란 무엇인지 알 법도 하다.
장률은 냉정하면서도 따뜻하다.
이 모순은 세상을 다루는 법과 바라보는 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는 세상을 다루되 그 안에 손발을 집어넣어 휘젓지 않는다. 아무리 비극적인 나락에 떨어질 지라도, 아무리 기쁠 지라도 카메라 프레임을 두고 그 너머에서 세상을 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카메라가 만들어놓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사라져 나간다. 카메라가 인물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시야 안에 나타났다가 지워지는 셈이다. 장률 감독의 이러한 촬영은 인생의 덧없음과 일회성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연극의 무대처럼 마련된 프레임이지만 그 프레임은 단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대보다 삶에 가깝다. 누군가 내 생애의 포커스에 잡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며, 인생이듯이 장률의 영화에서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그의 눈이 실상 원대한 긍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망종'의 마지막 장면이 대지로 걸어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멈추는 것도 그렇다.
장률의 새 영화 '경계'는 그의 이러한 특성들을 잘 보여주면서 또 한편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고 초원 한 가운데 헝가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다. 초원이 점차 사라지자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 그런데 헝가이는 이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초원을 되살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묘목을 사다가 매일 심지만 결과는 없다.
그러던 중 아내가 딸아이의 병치료를 위해 도시로 떠난다. 그리고 가족의 빈자리에 탈북자 모자가 들어온다.
'경계'에는 두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나는 헝가이가 아무런 대가 없이 탈북자 모자를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그는 길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침범에 관대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이 가냘픈 모자를 보호해주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자를 범하는 '남자'가 아니라 모자를 보호하는 '대리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무런 대가없이 말이다.
두번 째 장면은 자신의 집에 들른 다른 몽고인 여행객과 사막에서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다. 광활한 사막 위에 담요를 깔고 나누는 그들의 행위는 대자연과 어울려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 정사에는 치사한 계략이나 욕망 같은 거추장스러운 단어들이 없다. 대기를 흡수할 듯한 호방한 기질이 이 짧은 신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헝가이가 잠시 집을 비웠을 때 탈북자 모자는 이런 저런 수모와 굴욕을 겪는다. 결국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불분명하게 새겨진 길을 따라 모자는 모래바람을 헤치며 걸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다.
헝가이가 지나가는 탈북자 모자를 받아주듯, 장률 감독이 카메라 앞을 스쳐가는 그들을 프레임에 담았듯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다가왔다 사라질 뿐이다.
서늘하지만, 깊이 있는 엔딩이다.
강유정(영화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