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필성 감독의 작품을 보다보면, 어딘가 깊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전작 '남극일기'도 그랬다. 남극이라는 극지로 몰린 사람들은 극한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임필성 감독이 보는 인간이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닌 듯 싶다. 공포 앞에서 인간은 광기에 빠지고 극한 앞에서 비겁을 택한다. 2007년 신작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도 마찬가지이다.
'잔혹동화'라는 말답게 '헨젤과 그레텔'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날카롭게 뒤집는다. 원작 '헨젤과 그레텔'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는 좀 다르다. 마치 놀이공원 성 같은 집에 사는 세 남매가 있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과자로 채워진 식사를 하고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보석들을 가지고 논다.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집은 숲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길을 잃은 어른들이 들리게 된 이 곳,
그런데 이 집은 어딘가 괴기스럽다. 사고를 당해 이 집을 찾게 된 은수에게도 집안의 괴괴한 귀기는 찾아든다.
'헨젤과 그레텔'은 '아이'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준다.
우선 이 영화는 아이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일 수 있는 지 보여준다. 아이들에게는 도덕관념이란 게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다. 곤충을 잡아 팔, 다리, 날개를 떼어내며 노는 아이들은 그게 나쁜 행동이라 인식하고 있지 않다.
아이들은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생명을 가지고 논다. 게다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놀아달라, 이야기해달라며 어른들을 조른다. 아이들에게 그 요구는 너무도 분명하며 정당하다.
하지만 요구가 제한이나 억압 없이 지속될 때, 그것은 공포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규제와 도덕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아이를 얻음으로 인해 억지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어른아이'의 면면이다. 주인공 은수는 여자 친구의 임신과 어머니의 위독이라는 사건을 동시에 마주치게 된다. 어머니에게 갈 것인가, 임신 중절을 하겠다는 여자친구를 말릴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 있던 은수는 깊은 숲 속 아이들의 집에 감금된다.
결국 은수가 자신의 아이를 선택했을 때, 숲 속 아이들은 은수를 놓아준다. 흥미로운 것은 어머니를 찾아가겠다고 애원했을 때에는 아이들이 그 요구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의무와 관계 속에서 아이들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아이들은 1970년대를 겪었던 고아원 아이들로 밝혀진다. 복지도, 시설도 엉망인 양육기관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아이들이 그 원한으로 숲 속의 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깊은 심리적 트라우마 속을 헤매던 작품은 고아원과 크리스마스라는 이미지를 통해 사회적 언어를 만들어낸다.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란 너무도 고통스러운 축제일 수도 있다는 각성 말이다.
아동학대, 아동 대상 범죄와 같은 거시 사회적 담론으로 옮겨가지만 정작 '헨젤과 그레텔'의 매력은 어린 시절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동화적 기억에 대한 배반이다.
달콤하면서도 공포스럽게 남아 있던 과자로 만든 집의 이미지가 임필성 감독 특유의 미장센으로 녹아날 때, 우리는 섬세한 심리 드라마 한 편을 얻게 된 것이다.
강유정(영화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