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에 올라서서 자리를 잡은 아이반이 막대 끝에 흙을 묻히는가 싶더니 심호흡을 가다듬는다. "아~." 한순간 정적을 깨고 아이반의 고함 소리가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운다. 아이반의 손 끝에 달려있는 긴 막대도 빨간 황토흙을 흩뿌리며 낭창낭창 흔들린다. 푸드득 푸드득 노란 밭을 휘젓고 다니던 참새떼들이 깜짝 놀라 날아오른다. 고함을 지르며 참새를 쫓는 '허수아비 소년' 아이반의 고된 하루 일과는 꼬박 12시간을 채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
우간다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 겨우 14살 된 어린 소년이 우리였다면 걸레로도 쓰지 않았을 옷을 걸치고 어린 동생과 할머니, 소박맞은 고모와 갓난쟁이 애기의 생계까지 책임지기 위해 하루 12시간을 뙤약볕 밑에서 허수아비가 되어야 하는 곳이었다.
탤런트 고두심 씨가 지난 2월 한국어린이재단(www.childfund.or.kr) 나눔대사 자격으로 우간다와 에티오피아를 다녀왔다. 지난 3월14일 아프리카를 다녀 온 뒤 한국어린이재단에서 자리를 마련해서 만난 고씨는 아직도 그 곳에서 느꼈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 얼굴 한가득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 절망을 보다
이 자리는 고씨의 아프리카 봉사활동 내용을 담은 스크린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티셔츠 한벌만 걸친 수더분한 차림의 고씨가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진이 나오자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얌마네 얌마" "아이구! 저 아이가 본조였지?" 고씨는 사진을 보는 내내 아이들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면서 연신 한숨을 그치지 못했다. 고씨의 눈빛에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지구 반대 편에서 우리가 상상도 못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 사람이 태어나서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너무 가슴이 아프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절망을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 내내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
우간다와 에티오피아는 고씨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헐벗고 굶주린 땅이었다. 쓰레기 악취로 인해 길을 가던 아이들이 실신을 하고 하루 한끼 먹을 것이 없어 손으로 흙을 파 굶주린 배를 채웠다. 벽과 바닥도 제대로 없는 천막집 쪽방에서 집단으로 기거하는 마을사람들이 구걸과 호객 행위로 연명을 해 나가고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에이즈라는 힘든 병에 걸린 아이들이 병원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병마와 싸우느라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도 자주 봤다. 고씨는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한 소년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이도 뱃속에서부터 에이즈를 갖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도 애기도 온 가족이 다 에이즈에 걸려 고통스럽게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었죠. 아빠는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가족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한쪽 가슴을 내내 두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창 얘기 중에 집 모퉁이쪽을 보니 흙으로 된 둔덕 같은 게 길게 있는 거에요. 그 위쪽엔 퍼런 옷이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세상에 얼마 전에 죽은 아이 아빠가 그곳에 묻혀있다는 거에요. 내가 손으로 살짝만 파도 시체가 드러날 것 같은 얇은 흙이 덮여있을 뿐인데. 그곳에 그렇게 아버지를 묻어놓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충격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고씨는 여기까지 말한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한번도 경쟁체제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데 익숙지 않죠. 아프면 병원을 가야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그게 그들한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한가지는 아닐텐데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잖아요. 모르니까 모른 채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너무 안쓰럽죠. 하지만 그들이 만약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돈이 없으니 치료를 받을 수가 없잖아요. 차라리 그 상황에선 모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복잡했습니다."
◆ 희망을 그리다
사실 고씨가 해외봉사활동을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도 종종 베트남 등으로 해외 나눔활동을 다녀 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2박3일 일정의 단기 봉사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30년이 넘는 동안 쉼 없이 연기생활에 매진해 온 그였기에 오랜 일정을 비워 봉사활동을 다닐 짬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9박10일 동안의 아프리카 일정은 고씨에게도 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처음 가져보는 긴 휴식을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지내기로 결정한 것은 개인적으로도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이번 경험으로 내 인생을 돌아보고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된 것 같거든요. 일정이 짧든 길든, 장소가 어디든 봉사활동이야 모두 귀한 나눔이죠. 그중에서도 이번 봉사는 너무나 굶주린 땅에서 오랫동안 그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다보니 그들의 아픔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에 불평불만은 있을 수 없겠구나. 고씨가 아프리카를 다녀 온 뒤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아니 불평불만을 가진다는 게 죄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라는 극한의 절망을 경험해서일까.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감사해보였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먼저 눈에 어른거렸고 "이 돈이면 그 아이들이 몇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쳤다고 한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신비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눈빛들이 얼마나 맑고 순수한지 몰라요. 그 동그란 눈을 마주보고 있자면 마치 내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를 다녀와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썼잖아요. 그 표현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마 '꽃으로도 때릴 수 없을 만큼' 천사 같은 아이들인데 그래서 더욱 그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고씨는 무엇보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임을 몇번이고 강조했다. 물론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일회성 도움은 아니다. 단지 지금 잠깐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희망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배고픔이 해결된 뒤에라야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프리카 천사들을 위한 고씨의 나눔활동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그들의 아픔을 못봤으면 모를까 아프리카의 힘겨운 삶을 경험한 그는 앞으로도 기꺼이 '아프리카 지원활동'에 앞장 설 계획이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또 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할 생각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는 연예인에게 있어 나눔은 어쩌면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하는 탤런트 고두심씨.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기꺼이 나눠줄 줄 아는 그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워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나눔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우리의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힘이 되길 바란다.
*에티오피아.우간다 어린이 후원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센터 1588-1940
ARS후원 060-700-1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