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 ⓒ홍봉진 기자 |
"나 같은 경우는 대사를 잘 못 외워. 대사를 자꾸 반복해야 해. 그래서 형용사도 바꾸고 직유법도 하는 식으로 말장난을 해봐. 내 역할에 맡게 내 입에 찰싹 붙게 말이지. 그렇게 백번 이 백번 하다보면 생각나는 게 많은 데 그럴 때마다 대본에 적다보니 지저분하게 됐지. 모."
오늘도 그의 대사는 고작 몇 마디. 하지만 그는 수십 개의 애드리브를 준비한다. 그 대사를 PD에게 검사를 받고 또 받는다. 통과될 때도 많지만 거절당하기도 일쑤. 마흔 살이 넘은 그가 유치원생이 숙제 검사를 받는 것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계속된 대사 검사를 받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매번 열심히 한다. "이 대사 이렇게 치면 맛깔 날텐데."
그래서 인지 박철민의 연기는 맛깔나다. 신명난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이미 이한위, 이문식 등과 함께 '명품 조연'이란 말을 탄생시키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는 올 초 '뉴 하트'에서 흉부외과 의사로 '뒤질랜드'라는 유행어를 만들더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카바레 색소폰 주자지만 클래식을 동경하는 용기 역을 맡아 인기 몰이 중이다.
"처음에 용기 역을 맡았을 때 카바레 출신으로 가장 밑바닥에 사는 인물이면서도 클래식이라는 고급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하는 안달난 놈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 많이 했지. 그러던 중 킁킁 거리는 말투를 짚어 넣었는데 성질은 급한데 말은 안 나오고 말 더듬기도 있는 용기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 이었지. 요즘은 덜 하지만."
박철민 ⓒ홍봉진 기자 |
박철민은 극 중에서 예전과 달리 단원들하고 친해진 만큼 용기도 말하는 게 편해져서 킁킁거리는 횟수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분량이 적은 조연 배우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박철민은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이 몸서리를 칠 만큼 차이를 감지할 순 없어도 어색함이 드러날 순 있다며 자신의 연기를 연구하는 걸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배용기의 과거를 이렇게 풀이했다.
"배용기는 아마 집에 병든 아버지가 누워있을 거야. 그리고 어려서 클래식을 하고 싶어 했지만 가난 때문에 꿈을 접었고 그래서 밤마다 '돈텔파파'가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색소폰을 부르며 눈물을 훔치지. 얼마 전에는 아마 집에 병든 아버지에게 '제가 드디어 클래식 연주를 합니다'라고 말도 했을 거고."
박철민이 말하는 내용은 '베토벤 바이러스' 어디에도 없는 내용이다. 앞으로도 분량 전개상 없을 예정이지만 박철민은 대본에 없는 내용을 상상으로 만들어 감정을 이입한다. 사실 조연 배우는 주연 배우만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시청자들도 궁금해 하지 않고. 그래서 그들의 에피소드는 항상 물음표고 그들은 잠시 잠깐 보이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박철민은 다르다. 조연도 주연만큼 자기 인생에서 주연이고 그들 각각에도 사연이 있다. 그래서 박철민은 오늘도 수십 가지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하고 혼자만의 연기를 펼친다. 그는 용기가 드라마에서는 조연일 뿐이지만 자신의 삶 속에선 주인공이지 않겠느냐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런 용기의 삶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박철민의 에피소드도 다뤄지면 어떨까. 딱 한 장면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