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간) 63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시'가 각본상을 수상한 뒤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가 국내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팀 버튼의 입에서 '시'가 각본상이란 소리가 흘러나오자 칸영화제 프레스센터격인 와이파이존에 탄식이 흘렀다.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에서 열린 제63회 칸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가 각본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로선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이래 5번째 본상 수상이다.
한국영화는 지난 2004년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을, 2007년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2009년 '박쥐'가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07년 '밀양'으로 전도연에 여우주연상을 안긴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는 각본상을 수상했다. 결코 작은 상이 아니다.
하지만 '시'가 영화제 초반부터 황금종려상에 유력한 후보로 꼽힌 터라 아쉬움이 남는다. '시'는 이번 영화제 내내 국내외 언론에서 마이크 리의 '어나더 이어'와 자비에 보브와의 '신과 인간의' 등과 황금종려상 후보로 뽑혔다.
영화제 막판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전생을 볼 수 있는 분미삼촌'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기까지 '시'에 대한 기대는 계속 커져 갔다. 주인공인 윤정희 역시 줄리엣 비노쉬와 함께 여우주연상 후보로 꼽혔다.
칸영화제는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뒤 아시아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안기는 데 인색했다. 때문에 '시'가 황금종려상을 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실제 이날 오전 이창동 감독에 칸영화제로부터 시상식 참석 요청이 가자 국내외 기자들은 '시'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점쳤다.
주요 후보였던 '어나더 이어'가 탈락한 터라 '시'가 자비에 보브와 '신과 인간의'와 경합을 벌일 것으로 봤다. 더욱이 이날 수상에 실패한 중국 왕샤오슈사이의 '중경블루스' 팀이 시상식에 참석하자 각본상은 자연스럽게 '중경블루스'에 돌아갈 것으로 전망했다.
이날 오전까지 심사위원들이 결과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시'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과는 달랐다. 영화적으로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보편적이지 않기에 황금종려상은 어려울 것이라 봤던 '분미삼촌'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는 각본상에 그쳤다.
심사위원장인 팀 버튼의 성향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찬일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보통 황금종려상은 보편적인 영화에 안기고 심사위원대상부터 심사위원들의 개성이 발휘되는 법인데 이번은 다른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LA타임즈의 스테파니 콘필드 기자는 "'시'가 받지 않고 아핏차퐁 영화가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2004년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강력하게 밀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냈을 것이란 설명이다. 실제 국내외 영화기자들 및 평론가들의 평가와 칸영화제 수상결과는 종종 다르게 나온다.
지난해 필리핀의 브릴란테 멘도사 감독이 '키나테이'로 감독상을 받았을 때는 프레스센터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가장 혹평을 받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창동 감독은 "영화제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거짓"이라며 "평점은 봐도 결국 심사위원들의 선택에 모든 게 달려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사위원은 다르지만 황금카메라상도 예년과 다른 선택을 했다. 통상 장르영화보단 예술영화에 황금카메라상을 안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 수상한 멕시코 마이클 로우 감독의 '아뇨 비 시에스토'는 고독에 지친 여자가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모습을 일기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 내내 하드코어에 가까운 베드신이 스크린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결국 칸의 선택은 그 때 그 때 참여한 심사위원들의 성향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에 아시아인이 없었던 것도 '시'에 담긴 동양 정서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각본상 수상은 분명 값진 성과다. 축하받아 마땅하다. 예술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에 불쾌감을 느낄 수 있지만 칸영화제는 예술과 자본이 결탁한 사실상 영화 올림픽이다. 수상결과에 따라 각국 기자들이 저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지난해에는 중국기자가 심사위원기자회견에 이창동 감독에 "한국영화만 밀고 중국영화는 외면한 게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시'가 황금종려상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죄의식과 도덕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걸작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윤정희는 시상식 직후 한국 기자들과 만나 "르몽드나 피가로 등이 이 영화를 평한 것을 믿는다"며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에 더욱 신뢰를 나타냈다.
각본상 수상으로 '시'가 국내 흥행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