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스페셜 '순재, 날다' |
"싸움을 해도 하루를 넘기지 마라. 그러기 위해선 '야동'을 봐도 좋다."
배우 이순재가 후배 김정현의 결혼식 주례에서 한 말이다. 시트콤에서의 '야동 순재' 캐릭터가 빛을 발한 순간. 코믹과 멜로를 오가는 다양한 캐릭터 소화력과 연륜이 있는 이순재이기에 가능한 멘트다.
11일 방송된 MBC 스페셜 '순재, 날다'에서는 현역 최고령 연기자, 77세 노배우 이순재의 열혈 연기 인생이 그려졌다.
"세 페이지 분량 대본을 한 번에 쫙.. 40~50명 스태프들 기립박수 받았죠(이병훈 PD)", "'원하는 게 뭐냐. 내가 다 보여주겠다. 그런데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떠냐(이병훈 PD)'..배우와 감독의 가장 이상적인 대화가 아닐까(장진 감독)."
그와 작품을 했던 연출자들은 하나 같이 그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지붕뚫고 하이킥'을 기획할 때 김병욱 PD가 가장 먼저 캐스팅한 배우가 이순재. 김 PD는 "아버지 되시는 분이 모범적으로 잘 하시는 분이면 드라마가 바르게 굴러가는 게 있다"라고 밝혔다.
이순재에 대한 이 무한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와 호흡을 맞춘 배우들은 그의 성실함과 파격적인 변신, 변함없는 열정에 대한 찬사로 입을 모았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나문희는 "선생님은 국회의원까지 하시고 서울대 철학과 나오셨는데, 작품을 할 때는 연기자 이순재만 있다"며 "저런 연기까지는 안 한다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선생님은 다 하신다. 너무 잘 하시고 즐겁게 하신다"고 전했다.
망가지는 연기도 철저한 계산과 연습의 산물이라는 것.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김자옥은 "방구를 두 번 뀔 때 몰래 뀔 때 다 다르다.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고 설명했다.
황정음 역시 "최고의 배우시잖아요. 근데 새벽 두 시가 돼도 여섯 시가 돼도 스케줄 바꿔달란 말씀 한 번 안 하신다. 모두 스케줄에 맞추신다"며 존경을 표했다.
드라마 '이산'의 왕 영조와 시트콤 속 '야동순재', '방귀순재'까지 변화무쌍한 그의 연기 스펙트럼 역시 존경의 대상이다. 물론 변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연출자에게 조금 불편했던 걸 얘기 했었지. 고전적 이미지도 있고 아직은 점잖게 인식 되고 있는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땐 너무나 재미있는 설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합시다 그랬는데. 우려했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참으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이순재가 자시의 운명과도 같은 연기를 조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순재는 대학교 입학 후 처음봤던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영화 '햄릿(1948)'을 꼽았다.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에 반한 이순재는 이후 연극배우 활동을 거쳐 방송국 개막 시대와 함께 TV로 진출했다.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오가는 활동에서도 여전히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시트콤에서 손자로 호흡을 맞춘 정일우에게 연극 출연을 권하기도 했다.
이순재는 "TV 촬영 현장에서는 찍기 바빠서 배우의 연기 지도를 잘 못한다. 좀 더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며 "이런 과정(연극)을 통해 좋은 교수나 연출자 밑에서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연기 뿐 이랴. 그의 열정은 92~96년간의 국회의원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불안정" "생활에 절제가 없다"는 당시 배우라는 직종에 대한 나쁜 인식, 낮은 처우가 그를 국회로 이끌었다.
그는 "내가 잘못하면 연기자 전체가 비난받았다"며 이 때문에 의정활동에 더욱 힘을 쏟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이순재는 또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위해 연기 관련 강의를 하고,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우유배달원 만석 역을 위해 오토바이를 배우기 시작한 것.
"내가 하는 분명한 일이 있고 거기에 열중하다 보니까. 그걸 충실히 따라가는 것 밖에 없지." 밤샘 촬영으로 코피를 쏟으면서도 배우 이순재가 언제나 활력 있는 이유다. 연기는 그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