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근 기자 qwe123@ |
정지우 작가는 집필을 맡은 MBC 주말극 '글로리아' 제작발표회 당시 폭탄발언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남자 주인공 이천희(31)를 향한 것이었다. "'패밀리를 떴다'를 보면서 저 동네 바보를 어떨 것인가 걱정이 컸고요, 만나서도 '동네 바보를 계속 하실거냐'고 했어요."
취재진마저 숨을 죽인 '독한' 멘트였다. 정작 이천희는 그 순간에도 애정 넘치는 표정으로 정 작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 작가는 이어 "열정과 가능성을 봤다"고 그런 이천희를 믿음직하게 바라봤다. 이천희는 첫 방송부터 그 믿음에 충실히 부합했다. 누가 아직도 '엉성천희'를 논하는가. 묻고 싶다. '글로리아'를 봤냐고.
이천희는 '글로리아'에서 희망이라고는 없는 나이트클럽 건달 하동아 역을 맡았다. 이천희 스스로도 "그런 놈 있으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혀를 내두르는 하동아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 합의금을 마련한다고 하는 게 남의 집에 들어가 세간 살림을 다 때려 부스는 행패 끝에 돈을 받아내는 방법 밖에 없는 남자다. 재벌가의 서녀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면서 더 절망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이천희는 처음 맡은 그 만만찮은 캐릭터를 제 옷을 찾아 입은 양 그려내는 중이다. 남자 냄새가 물씬 난다.
"하동아라는 캐릭터, 처음부터 완전 좋았어요. 멋있다기보다 매력이 있었죠. 정말 그런 애가 있었으면 저같아도 '진상' 이러면서 경찰에 신고한다 했을 텐데,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요. 걔는 '또라이'가 아니거든요. 세상에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런 것 뿐이지. 안타깝고 애잔하고…. 그래서 매니저를 막 졸랐어요. 이거 내가 해야된다고."
하지만 이천희가 그 역을 맡았을 때 많은 이들이 정지우 작가 비슷한 걱정을 했다. 예능이 만들어준 '엉성천희'라는 캐릭터는 연기자에게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람 좋고 소탈한 그의 인간적인 면을 세상에 드러내보인 '패떴'은 그에게 친근한 이미지와 함께 배우로서의 심각한 과제를 안겼다. 세상물정 모르는 사고뭉치 청년으로 등장했던 '그대 웃어요'가 이후 연기자로서 연착륙을 위한 작품이었다면 '글로리아'는 완전한 탈바꿈이 필요한 작품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이명근 기자 qwe123@ |
"사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계속 고민이 많았어요. 사람들이 '패떴' 이미지를 떠올리면 당시 '세종대왕'에서 장영실로 나왔을 때처럼 되지는 않을까, 진지한 거 하면 사람들이 웃을까봐 고민이 됐어요. 하지만 이제 끝난 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이제는 뭔가 해야 할 때가 됐다 생각했어요. 동아를 통해서 뭔가를 바꾸고도 싶었고요.
그런데 첫 대본 리딩때 완전히 호되게 당한 거예요. 정지우 작가님한테 '어떡하려고 그래요' 이런 소리를 듣고 '나 때문에 드라마 망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다른 거 없었어요. 엄청나게 열심히 준비해야지. 처음 1·2회 나가고 배두나한테 '너 장난 아니던데'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기분이 좋았어요. 사실 연기하면서 쾌감도 있거든요. 막 분노하면서 테이블 하나를 싹 쓸어버리는 거, 언제 해보겠어요.(웃음)"
따끔한 지적을 아끼지 않던 무서운 정지우 작가는 지금은 이천희가 직접 전화를 걸어 디테일한 감정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됐다. 이런 경험은 이천희에게도 처음이다. 이천희는 "정 작가님이 해맑게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즐거워했다. "작가님에게 전화하는 게 정말 요긴하긴 한데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의지하게 된다"고 싱긋 웃으며.
"앞으로는 연기하기가 더 어려워요. 저 여자는 나랑 안 되는 왜 자꾸 나타나나 좋으면서도 미안하고, 남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순간순간 달라지는 복잡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앞으로는 더 상황이 극적으로 치달을 것 같거든요. 요즘엔 촬영하면서 한 회를 내내 울어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어요. 지금부터는 다 제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 이상이 나오게 될 테니까. 쉽지 않겠지만 해 봐야죠."
'엉성천희'로 모델 출신 연기자의 틀에서 훌훌 벗어난 이천희는 이제 그 '엉성천희'를 벗어난 새로운 연기자로 시청자 앞에 섰다. 이 우직하고도 뚝심있는 배우, 왠지 믿음이 간다. 그가 그려갈 앞으로의 하동아가 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