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균 기자 tjdrbs23@ |
결혼해 잘 살다, 갑자기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났다면? 예전엔 '이정도면 됐다'고 살았던 걸 깨닫게 된다면? 진짜 뒤늦게 100% 맞는 여자를 만났다면?
영화 '여덟번의 감정'(감독 성지혜)은 불쑥 이같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같은 상황은 또, 또 반복될 수 있다. 남편들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을만큼 갈팡질팡하는 남자의 마음이 섬세하고도 재치있게 풀어낸 이 영화에 시사회 이후 남성들의 '심한' 공감이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 종훈으로 분한 이가 바로 배우 김영호(43). 복싱 선수 출신의 건장한 몸에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을 지닌 이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이 변덕스러운 수컷의 모습을 그려냈다.
◆남녀 만나는 데 울렁증..술도, 담배도 안해
사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 종훈은 직접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 제안을 받을 정도인 김영호와 일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김영호는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남자가 심하게 공감하는 영화를 찍어가지고….(웃음) 이해가 솔직히 되는 이야기예요. 100% 맞는 여자를 만나면 고민하게 되지 않겠어요? 보통 사람들은 다리를 걸치고 있대요. 저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너무 감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만큼 괴로워할 거예요. 죽을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사랑에 인색해요. 죽을만큼 좋은 사람을 찾는다는 건 그만큼 고집이 세다는 거고 그만큼 인색하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그러고보면 종훈이 바람둥이는 아니죠. 보통 바람둥이는 육체적인 데 빠지지만 종훈은 자신의 '이상'을 보는 거지요.
시나리오 상의 모습과 저는 많이 달라요. 전 짝사랑도 안 해볼 정도로 사랑에 인색하고 사랑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고, 남녀가 만나는 데 대해 울렁증 같은 게 있어요. 같은 성을 만나는 거야 뭐, 다 체육과 동생들 같아요. 바로 척척 얘기도 하고, 그냥 형이거든요. 그런데 여자는, 땡깡이 심하고 대책이 없어요.(웃음) 뭐라고 하면 울 것 같잖아요. 잘 안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평소때 선배님을 보는 것 같다'고 해서 '내가 이런 얼굴을 갖고 있나' 싶더라고요. 어쨌든 제 여성관과는 전혀 달라요.(웃음)"
ⓒ임성균 기자 tjdrbs23@ |
◆작은영화의 단비와 아줌마의 로망 사이
김영호는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과 '하하하', 진한 부정을 그린 '부산', 그리고 이번 '여덟번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감성의 작은 영화에 애정을 갖고 있는 배우다.
노개런티, 혹은 '받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은' 게런티를 감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동시에 김영호는 주부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멜로 드라마의 인기있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금도 MBC 아침일일극 '주홍글씨'에 출연중이다. 드라마가 자신이 품위있는 생활을 유지하게 할 수 있게 한다면, 영화는 또 다른 장이 되느냐는 질문에 김영호는 '빙고'를 외쳤다.
"제가 꽤 배우로서 메리트가 있나봐요. 많은 감독들이 영화배우로서 찾고 싶어하고. 그런데 그 와중에 상업 영화와는 조금 다른 작품들을 더 많이 찍은 것 뿐이죠. 그렇다고 생활의 기반이 된다고 해서 제가 안 좋은 드라마를 하는 건 또 아니에요. 모두 다 좋아서 제가 했지요.
이번 '여덟번의 감정'은 '밤과 낮' 캐릭터와 너무 비슷해서 안 하려고 했어요. 이틀을 있다가 느낌이 확 왔어요. 순간 느낌인데, 그걸 말로 하기엔 애매해요. 바로 전화를 했죠. 한다고.
결혼사진을 찍기 전 잘 차려입은 남자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드를 먹는 장면은 제가 제안했어요. 다른 모습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던건데, 아이템을 냈으면 마지막까지 책임지라 해서 나중에 또 찍었죠.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어쨌든 그 바람에 너무 많은 걸 책임지게 됐어요.(웃음) 받은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아요. 자동차도 다 고장났는데(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김영호 본인의 것이다) 고쳐주지도 않고. 감독이 자기는 영화가 끝났다고 관심이 없대요. 이거이거, 대책이 없어요∼"
ⓒ임성균 기자 tjdrbs23@ |
◆배우, 화가, 시인, 뮤지션..그리고 영화감독
영화 '미인도'에서 김홍도로 등장한 김영호는 실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노래를 하는 배우다. 웬지 희화화된 단어지만 '종합예술인'이라는 표현이 그에게는 딱 어울린다. 그림 개인전 제안, 시집 출판 제안도 받을 정도다. 앨범 제안까지 있다. 그에게 혹시 영화 연출은 생각하지 않고 있냐 했더니 마침 준비를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놉시스는 다 썼고, 준비하고 있어요. 나중에 바뀔 수는 있는데 제목은 '환상'이에요. 기타치고 노래를 부르는 보통 남자의 이야기가 될 거고요, 또 다른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있죠. 아마 제가 직접 출연을 할 것 같아요.
촬영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내년 혹은 그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연기를 잘 하는 배우로 평가받고 있는데 어설픈 연출을 해서 나머지를 엎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 만큼의 노력,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전, 시집 등등 계획은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순리에 맡기는 거죠. 그렇다고 막 바쁘게 하는 건 아니에요. 굉장히 여유가 있는데요. 저를 계속 달리게 하는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살면서 세월이 서글프고, 또 세월이 좋아요. 삶이 주는 소소한 것들이 좋거든요. 지금처럼 여름의 끝자락이 붙들고 있는데 가을이 오고, 계절이 바뀌는 그런 냄새마저도 좋아요.
종합예술인이라. 제가 다 잘하지는 못해요. 다만 제 마음이 남들과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제가 쓴 글에 공감을 하니까. 저만 아는 느낌으로 쓰면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잖아요. 그냥 제 이야기를 잘 풀어서 끄집어 내놓자 하는 거죠. 그게 제 갈 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