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영혼지배·싸이코패스..新악녀본색

배선영 기자 / 입력 : 2011.02.2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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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왼쪽,ⓒ이명근 기자)·이유리,황선희


또 한 번 악녀들의 시대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그녀들은 더욱 치밀해졌고 표독스러워졌다. 독기는 감추되 결정적인 순간 원하는 것을 낚아채는 세련됨마저 갖추었다.


과거 안방극장을 지배한 악녀들은 삼각관계에 얽혀 사랑을 쟁취하고자 음모를 꾸미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안방극장 악녀들은 내면에 감춰진 콤플렉스를 포장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상대를 옥죄어 오는 섬뜩함을 갖췄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도 구식 악녀들이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악녀들은 이제 가면을 쓰고, 타인의 영혼을 지배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안방극장 속 새로운 악녀들의 본색을 살펴봤다.


먼저 MBC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의 황금란(이유리 분)을 살펴보자.

타인의 실수로 친모 친부가 바뀌었다. 억척스런 어머니와 노름꾼 아버지 밑, 쳇바퀴 돌듯 숨 막히는 일상이 반복된다. 대형 서점 직원인 금란은 소설코너, 학습지 코너 등을 옮겨갈 뿐 그 이상의 것을 꿈꾸지 못하는 인생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유일한 희망이 있다. 바로 사법고시를 패스한 남자친구, 승재(정태우 분)와의 결혼이다. 결혼식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황금란. 하지만 이 남자, 이제 자신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여기까지의 설정은 언뜻 구식으로 비춰진다. 열심히 뒷바라지 한 내 남자가 조건 더 좋은 여자를 찾아 나서고, 거기에 상처받는 여자. 식상한 레퍼토리다.

하지만 황금란은 다르다. 그녀는 승재의 뺨을 때리는 대신 무릎을 꿇는다. 그가 선보는 자리에 나가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며 자신의 머리에 주스도 끼얹는다. "승재씨는 내 유일한 창이고 태양이야"라고 말하는 그녀는 결코 사랑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남자의 조건 때문이었다. 오로지 그것을 가져야 하기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척 연기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황금란의 표독스러움은 부자 친모 친부를 찾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 예비 며느리를 연기한다. 이제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내심 한정원(김현주 분)의 몰락을 바라는 잔인함도 보여준다.

22일 첫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마이더스' 속 유인혜(김희애 분)는 우아하며 당당하다. 흡사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하는 어마어마한 부와 카리스마도 갖추었다. 하지만 완벽한 그녀도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다.

1회 방송에서 맛보기가 등장했다. 기업 인수 합병 과정에서 거액의 돈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임직원들을 몰아내려는 그녀의 기술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티끌 하나의 온정도 그녀의 표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유인혜라는 여자, 첩의 자식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녀 마음속에도 숨겨진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버지 유필상 회장(김성겸 분)을 존경하지만 동시에 혐오한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결국 그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유인혜는 자신의 기업 변호사, 열혈 청년 김도현(장혁 분)의 영혼을 지배해버린다. 순수함을 간직한 그 청년이 돈 앞에 몰락해가는 모습을 내심 즐기게 된다. 어느 새 그녀 자신도 그토록 혐오한 유필상 회장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

마지막은 더욱 가관이다. SBS 수목드라마 '싸인'에 등장하는 강서연(황선희 분)은 국내 드라마 속 최초로 등장한 여성 사이코패스. 한 때 사랑했던 남자를 죽이는 것은 물론, 사건과 관련된 증인들을 모조리 잔인하게 제거한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즐기는 듯 묘한 미소를 띤다.

신인배우 황선희가 연기한 이 캐릭터는 1회에 짧게 등장한 후, 중반부 돌연 사라졌다. 이후 후반부에 재등장한 뒤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저 평범한 악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브라운관을 지배한 악녀들은 과거의 그녀들과 확연히 다르다.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할 수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들의 활약상이 매회 궁금증을 자극한다.

동시에 그녀들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한 편의 공포영화를 연상케 한다. 점점 비뚤어져가는 사회 속 현대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대변한 듯한 이들 신(新) 악녀의 등장이 마냥 반갑지 만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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