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희ⓒ임성균 기자 |
노은설은 웃었다. 밝게. 차지헌은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최강희는 "은설이(최강희 분)는 판타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지헌이(지성 분)만 행복하면서도 묘하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라고 엔딩신을 설명했다. 최강희가 그려낸 SBS '보스를 지켜라'(이하 '보스')는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도,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도 아니었다.
5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아직 은설에서 벗어나지 못한 최강희를 만났다.
최강희는 드라마가 끝난 소감을 "그리워요"라는 한 마디로 압축했다.
그녀는 "우리(배우)가 벗어던진, 우리는 껍데기잖아요. 가상의 캐릭터 은설이 지헌이들이 너무 그리워요"라고 말했다.
'보스'에서 자기 주장이 강하고 의협심 강한, 왕년에 한 가닥 했던 노는 언니 역할을 맡은 최강희는 은설과 비슷한 면이 전혀 없다고 했다.
최강희는 "재벌 같은 걸 떠나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건 같은 것 같아요. 그 외에 모든 건 달라요. 싸움을 잘하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서 주장을 하는 주변머리는 못 되는 것 같고, 학창시절에 발표도 해 본 적 없어요"라고 말했다.
의외였다. 당당하고 통통 튀는 모습은 최강희가 출연한 작품 전반에 걸쳐 기저에 깔린 그녀의 모습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 최강희라니 상상이 안 됐다. "그립다"라는 표현은 실제모습에 대한 대리만족인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캐릭터들에 그런 게(대리만족) 있었다면, 은설을 통해선 가상세계를 만들어놓은 게 있어서 그리운 것 같아요. 드라마라는 게 있을 법한 일도 있고 아예 있기 힘든 일도 있는데, '보스'는 현실세계인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판타지거든요. 15년 넘게 하면서 캐릭터 이름을 불러본 적도 처음이고, 이런 기분도 처음이에요."
'보스'의 전개는 다른 드라마와 달랐다. 하나의 갈등이 한 회, 길어도 두 회 안에서 해소됐다. 갈등이랄 것도 없었다. 은설만 바라보던 무헌(김재중 분)도 하루아침에 마음을 접었다.
최강희는 "(작가님이) 무헌이를 확 정리해버리셨어요. 무느님을 무느님이라 부르지 못 해 아쉬웠죠. 그리고 지혜랑 바로 붙였어요. 무느님도 굉장히 당황했죠. 10회에 절절한 얘기가 있어 기대했는데"라고 두 남자의 사랑을 오래 받지 못한 데 대한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은설은 무헌과 지헌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던 은설로서는 일관성이 없는 행동. 시청자들도 이에 적잖은 의문을 표했었다.
"완전 의외라 저도 놀랐어요. 그런데 그 점 때문에 더 친밀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우리랑 다를 게 없으니까요. 주장 강하고 분명해야 하는데 안 그러잖아요. 할 때는 저도 이해가 안 됐는데 나중에 보니까 작가님, 감독님 의견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분들은 나무가 아닌 숲을 보시잖아요."
'숲'이라.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요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판타지라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삼각관계를 한방에 정리하는 신이 있었어요. 지헌과 은설이 서로 동네에 가겠다고 하는 장면으로 엔딩을 마쳤었어요. 그런데 다음 신에서 바로 은설이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을 막 패는 장면이었어요. 은설의 판타지죠.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빼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결국 방송엔 들어갔어요. 감독님께 '은설이는 상상도 저렇게 극악스럽게 하나요?'했더니 감독님이 저런 게 들어가야 시청자들이 통쾌해하고 은설이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죠. 감독님이니까 그런 걸 보지 않으셨을까하고 이해했어요."
'보스를 지켜라' 엔딩장면ⓒSBS 캡쳐 |
최강희는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엔딩과 동시에 다소 특이한 장면을 꼽았다. '4차원' 최강희로서 기억하는 것인지, 은설로서 인상 깊었던 장면인지, 묘했다.
"지금은 엔딩 장면이요. 대본에 '낮, 예쁜 거리에서'라고 쓰여있었는데, 촬영을 밤 11시에 했어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다들 비가 와서 어떡하냐고 그러는데 제가 감독님께 '비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한 우산 안에 있으면 하나가 된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하니까. 또 비 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 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쩄든 빗 속에서 찍었어요."
"나윤이(왕지혜 분)가 무헌이한테 '왜 이렇게 덥지? 이제 봄 가을 다 없어지고 여름 겨울만 있는 것 같아'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꿈속에서 하는 대사 같았어요. 잠깐 지나가는데 의미 심장한 것도 아닌데 그 신이 끝날 때 엔딩처럼 이상했어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애니메이션 보면 비슷한 장면이 있는데…"
시공을 초월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라고 했더니 최강희는 기다렸다는 듯 "예!예!"라고 말했다. 아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그 장면에서 그녀는 '보스'의 판타지를 본 듯 했다. 그만큼 빠져 있었다.
' 보스'는 악역이 없는 드라마로 호평 받았다. 선악의 구도도, 치열한 삼각관계도, 재벌과 서민 간의 경쟁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 그런 공식이 있으면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없었어요. 그래서 어려웠죠. 그게 작가님이 꿈꾸는 세상이었을지도 몰라요. 작가님이 마음속의 노은설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최강희ⓒ임성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