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범 기자 leekb@ |
흰 피부와 긴 머리, 큰 눈을 지닌 그녀는 한때 가녀린 첫사랑의 아이콘이었다. 배우 손예진(29). 2001년 드라마 '맛있는 청혼'으로 주연을 꿰찬 이래 10년, 늘 주인공으로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빈 그녀의 청순가련 외모는 신이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채 만 서른살이 되지 않은 이 여배우가 지닌 신뢰와 노련미는 오로지 그녀가 하나하나 만들어간 것이다. 불륜에 빠져든 주부(외출), 전 남편의 연을 놓지 못하는 이혼녀(연애시대), 잘 나가는 연애의 선수(연애의 정석), 두 남편을 지닌 아내(아내가 결혼했다), 대담한 사기꾼(무방비도시), 정의파 사회부 기자(스포트라이트),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여인(백야행), 철딱서니 없는 동거녀(개인의 취향)….
고운 얼굴 아래 참으로 다양한 여인들을 쉼없이 품었던 그녀가 이번에 귀신 보는 아가씨로 나섰다. 호러 멜로 코미디가 섞인 이종 로맨틱코미디 '오싹한 연애'(감독 황인호·제작 상상필름)의 여주인공 여리는 눈에 귀신이 보여 세상과의 문을 닫았다. 씩씩하게 스크린을 휘젓던 손예진은 세상이 먼저 잡아주지 않으면 그 문을 열 수 없는 여인이 되어 가만히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남에게 위로받는 게 자신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그녀. 늘 괜찮아 보였던 그녀의 손은 참 곱고 여렸다.
-올 가을 겨울 로맨틱 코미디가 많다. 신흥 주자들 사이에서 로코퀸 자리도 지켜야 하고.
▶로코퀸이라고 하기엔 '작업의 정석' 말곤 안 하지 않았나. 다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을 걷는다면 우리는 삐딱하다. 호러와 코미디, 멜로, 그걸 잘 넘나들었다고 생각한다.
-잘 되겠다는 느낌이 오나?
▶영화 찍기 전에는 누구나 '이 영화 대박날 것 같아' 하면서 결정을 하지 않나. '좋았어' 하고 찍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거 되려나' 하다가 개봉을 앞두고는 또 불안하기도 하고. 그게 다 똑같은 마음일거다. 재밌게 찍힌 장면은 너무 만족스럽다. 그런데 나는 긍정적인 스타일은 아니어서 항상 의심을 한다. 항상 의심하면서 어찌어찌 하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젠 내 손을 떠났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에.(웃음)
-손예진이란 배우는 특히 이런저런 편견에 많이 시달려 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새침할거야, 까다로울 거야 생각하곤 한다.
▶누구나 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가 다 다르지 않나. 예전부터 그런 게 재미있었다. 누구나 '나는 있잖아 이랬어.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나.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이런데, 다른 사람이 보는 그 사람은 그게 아니곤 했다. 그런 데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다르지 않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예진이는 남자야', '저 안에 남자 있다' 이러는데, 또 '쟤는 왠지 차가울 것 같아', '깍쟁이같아' 이런 사람들이 또 있을 거다. 다른 분들에게 보여드리는 모습과 내면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TV에 나오면 더더욱 그렇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무릎팍도사'에서 연예인 친구가 없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다 그걸 기정사실화 하고 보더라. 사실 누구랑 친하다고 하고 보면 두루두루 다 친하지 않겠나. 깊숙이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나는 그냥 '연예인 친구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이기범 기자 leekb@ |
-작품을 선택하는 걸 보면 '알고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흥미가 실제로 있는 것 같다.
▶나는 정말 신기하다.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다.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친구들도 가끔씩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야, 연기하지 마' 이런다. 연기자라는 게 뭔가 유리벽 같은 게 있나보다. 지금은 그런 데서 내가 많이 여유로워졌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다 시간이 지난 탓일 거다. 그런 거 걱정할 때는 지나지 않았나.
-배우라 그런 걸까. 다 초월했다는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이럴 땐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힘들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앞에 누군가 있을 땐 웃다가 없을 땐 어둠 속에 있곤 한다는 걸 걸 다들 알고 있을 거다. 내 애환을 이야기 하고 나서도 '그건 그거고'하고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 역시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긴 쉽지 않아' 다시 확인하곤 한다. 나와는 상관없이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져 버렸구나 싶은 거지. 그런 데선 살짝 포기한 부분도 있다. 누구나 위로받고 싶지 않나. 내가 손을 내밀면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니가 뭐가 아쉬워' 그러면 사실 서운하다. 그렇다고 울 수도 없고. 그냥 웃는다.
-거쳐 온 역할들 때문에 더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나이보다 세상을 많이 산 것 같은, 노련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번 역할은 확 다르긴 하지만.
▶나이에 비해서 너무 그런 거지. '너무 인생을 많이 살았어' 이런 이야기를 다른 분들도 하신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다보니까 더 그랬던 것 같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습득하는 게 빠른 것 같다. 그렇다보니까 좋게 이야기하면 똑똑하다 하시고, 아니면 어리면서 영악하다고도 하시는 것 같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은 것 같다. 더욱이 '백야행', '연애시대' 이런 삶을 짚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다보니 어린 나이에도 많은 걸 해오긴 했다. 이제는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꾸 그런 역을 하다보면 거꾸로는 못 올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웃음) '개인의 취향'이나 '오싹한 연애'도 그런 의도에서 더 밝고 풋풋한 걸 해보게 됐다.
-그러고보니 손예진도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됐다.
▶남들은 '아직 애기야' 하기는데, 여배우 서른이라는 게 참 묘하다. 예전에는 서른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참 묘하다. 예전에 했던 걸 뭔가 되짚어서 지금 하면 그때 그 얼굴은 아니겠지만 뭔가 깊이있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궁금하기도 한 게 사실이다.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 빨리 서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1월 11일 생일이 되어서 케이크에 장초 3개가 꽂혀있는 걸 보니까 '와 고마워' 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그걸 훅 금방 끌 수가 없는 거다. 계속 그 초에 시선이 꽂히면서 생각을 하게 되고. 되게 이상했다. 이제 서른 하나, 서른 둘 되다보면 어떤 느낌이 될지 모르겠다.
영화 '오싹한 연애'의 손예진 <영화스틸> |
-'나도 외로워,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는 손예진이라니, 전과는 퍽 다른 느낌이다.
▶사람들을 통해 받는 위로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어차피 없어지지 않는 외로움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우리가 서로 외롭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오히려 더 여유로워지고 편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늘 힘들어 보이지 않고 싶었고, 남들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고 그랬다. 어찌 보면 독한 성격인데, 괜찮은 척 아닌 척 하고 싶었던 면들이 배우를 하고 연기를 하면서 더 단단해졌다고 할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두고 겁이 났던 것도 같다.
-'오싹한 연애'에서 가장 수심 많고, 괴로움 많고, 남이 손을 잡아줘야 하는 캐릭터를 맡은 게 우연같지 않다. 왠지 사랑을 해야 할 것 같다.
▶다 내가 서른이 되어서였을 수도 있고, 생각이 바뀌어서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일 수도 있다. '오싹한 연애'에서도 조금씩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사실 '오싹한 연애'의 여리는 나보다 더하다. 나야 할 수 있는 데 안하는 거였다면, 걔는 목숨을 걸고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이 나와야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거니까. 연애는 좀 시켜달라. 뭐가 없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