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범수ⓒ사진=임성균 기자 |
"슛 들어갑니다. 오케이. 한번만 더! 좋았어!"
동도 트지 않은 오전 7시. 밤을 샌 배우들의 눈에는 피곤함 대신 총기가 넘친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PD의 눈에도, 조명과 촬영을 맡은 감독들의 행동에도 힘이 살아 있다.
한 신을 찍는 데만 꼬박 2시간. 방송으로 보기엔 1분여에 불과한 장면에 80여 명의 스태프와 배우가 공을 들이고 있다. 밤샌 촬영에 지치기는커녕 디테일이 묻어나니 작품이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촬영장에서 출발한 웃음이 안방까지 전해지는 셈이다.
이것이 이범수가 SBS 월화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극본 장영철 정경순·연출 유인식)에 대해 갖는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오전 8시 30분께 촬영이 끝났다. 11시까지 경기 고양시 SBS 일산제작센터 세트에 도착해야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범수를 만났다. 고단할 법도 한데 웃는 얼굴로 임해줬다.
이범수는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명랑하고 코믹한 청년 유방 역을 맡았다. 신약개발에 얽힌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되며 천하그룹에 입사하게 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CEO까지 올라가게 되는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그린다.
하지만 전작인 SBS '자이언트'에서는 경제개발의 명과 암에서 고군분투하는 다소 무거운 역할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맡은 역할이 더 어렵다. '자이언트'도 물론 그렇지만, 단선구도가 아니라고 할까. 웃음을 주면서도 진지한 힘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회마다 진정성 있게 시청자들의 마음에 달라붙어야 한다. 영화 '올드보이' 패러디 같이 가벼운 장면도, 진정성과 뭉클함을 전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기술을 요하는 것 같다"
그를 칭하는 말 중에 하나는 '코믹연기의 대가'. 이번 작품에서 역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괴짜 역할로 웃음의 일등공신을 맡고 있다.
"'코믹연기의 대가'라고들 하시는데, 스스로 갸우뚱했다. 코믹연기만 잘하고, 다른 장르는 못 하는 것처럼 한정짓는 것 같아 경계했다. 어떤 연기든 진실성을 갖고 접근해야 하는데 코믹연기야 말로 순발력을 요하는 거다. 웃음을 주기 위해선 예상해선 안 된다."
배우 이범수ⓒ사진=임성균 기자 |
정려원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즉석 애드리브를 구사한다고 했다. 완벽히 준비해오는 것보다는 현장의 흐름에 적응하는 타입인 듯싶었다.
"연기는 현장성이다. 그렇게 배웠고 가르쳤고 실천했다. 문학적으로 대본에 쓰인 것을 대중 앞에 살아있는 인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장르를 떠나서 리허설할 때 현장의 속도, 흐름을 더 사실성 있게 나타내야 한다. 그래서 더 신선해 보이고 새롭게 다가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정려원은 과거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가수 출신이란 텃세를 받았다고 토로했다. 오래 연기생활을 해 온 이범수 눈에 정려원은 어떻게 보였을까.
"가수나 모델, 이런 출신을 떠나서 중요한 건 현재 이 작품에 임하는 태도다. 얼마만큼 준비를 했고, 진실 되게 임하느냐 하는 문제다. 실질적 준비 없이 기존 분야의 인기에 치중하는 게 배우들의 거부감을 사는 것 같다. 려원씨는 온 몸으로 성실하게 '샐러리맨 초한지'에 임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예쁨을 받는다. 짜장면 뒤집어쓰는 신도 시간에 쫓기고 추웠는데, 침착하고 차분하게 짜증 한번 안 내더라. 그런 면들이 작품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려원씨의 새로운 모습인 것 같다."
'외과의사 봉달희', '온에어', '자이언트' 등 하는 작품마다 홈런을 쳤다. 작품을 볼 때 무엇에 주안점을 두는지 의문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 작품을 선택할 때 얼마나 신선한 소재이고 새로운 시도인지를 본다. 얼토당토 않는 현실과의 구분도 필요하다."
특히 이번 작품은 '자이언트'의 제작진이 다시 뭉친 드라마. 더 큰 믿음이 있을 듯 싶었다.
"'자이언트'를 했던 팀이 모였기 때문에 팀워크가 강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구태의연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오차범위를 줄일 수 있는 거다. 그만큼 다른 데 에너지를 쓰고, 의견 조율이 긴밀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 처음 '샐러리맨 초한지'를 받았을 때 시놉시스도 안 나온 상태였는데, '자이언트'의 작가와 PD가 간다고 해서 믿고 시작했다. 그 분들 또한 이범수가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더 새로운 모습으로 기대를 져 버리지 않을 거란 신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호흡이 더 잘 맞는다."
이범수는 '샐러리맨 초한지'를 통해 직장인의 애환과 아픔을 다루고 싶다고 했다. 집필을 맡은 정경순 작가 역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현장에 달려갔던 샐러리맨의 모습에서 작품을 기획하게 됐다고 전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듯이, 이 시대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 한해 우리나라에서 표방하는 슬로건이 진정성, 친서민이라고 한다. 유방은 가진 게 없지만 정의로움과 성실성 하나로 천하그룹의 CEO가 된다. 평사원이 CEO가 되는 과정에서 샐러리맨의 고민과 애환을 다뤄보고 싶다. 소모되는 웃음이 아니라, 울고 웃는 애환과 극복을 보여주려싶다."
배우 이범수ⓒ사진=임성균 기자 |
샐러리맨의 비애를 다룬다고 보기에 아직은 기업 간의 암투에 가깝다. 이범수를 제외한 출연진 역시, 재벌 외손녀에 엘리트급 이사 등이니 진짜 샐러리맨은 등장하지 않는 셈이다.
"후반부에선 다뤄지리라 믿는다. 코믹터치를 표방하기 때문에, 무슨 샐러리맨의 삶이 저렇게 웃기냐고 생각하셔서 첫 단추부터 어긋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재를 샐러리맨으로 다뤘냐는 여부가 문제는 아니다. 다큐가 아닌 이상 웃음을 줘야하고 그만큼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 드라마의 매력은 그런 소재를 건드리면서도 코믹 코드에 맞게, 또 공감할 수 있게 가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이범수가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로서 갖는 희소가치는 뭘까.
"스스로 격려하고 주위에서 가장 듣기 좋은 칭찬 중 하나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라는 것이다. 멜로, 코믹, 휴먼, 액션 등 장르적 면에서 넓게 활동할 수 있다. 코믹한 상황에서 갑자기 찡한 뭉클함을 주는 데는 상당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에 대한 소중함을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지닌 채 배우 생활 해오고 있다."
2012년이 밝은 지도 어느 덧 한 달여 지나간다. 뒤늦게 신년 소망을 물었다.
"더 발전된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촌스럽지만 더 많이 박수 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족계획, 둘째를 가질 계획도 갖고 있다. 일적으로는 더 왕성한 활동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에서 개성 강한 캐릭터로 입지를 다져온 이범수. 그에게 연기란 어떤 의미일까.
"연기야말로 최고의 인간탐구라고 생각한다. 한 유형의 인간을 들여다보는 거다. 잘났든 못났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연기는 역사, 심리, 철학, 사상 등이 다 버무려져서 투영되는 것이다. 때론 짠하고, 증오스럽기도 하고 영웅처럼 멋지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밉기도 하다. 인간의 총체적 모습이기 때문에 연기는 인간적이고 철학적이다. 인간애적인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만큼 진지하고 경솔치 않게 다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