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진 기자 |
봉태규는 한 때 충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20대 개성파 배우였다. 2000년 영화 '눈물'로 데뷔한 이래 시트콤에서 코믹 이미지를 얻고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맹활약을 펼쳤다. CF 없이 출연료로만 고수입을 올리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그랬던 봉태규가 2008년 영화 '가루지기' 이후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드라마에 카메오로 등장하고, 연극 무대에 섰을 뿐이다.
그 기간 동안 봉태규는 아팠다. 디스크가 악화돼 철심을 6개 박는 수술을 했다. 마음도 아팠다. 2010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봉태규는 집에 틀어박혀 자책하고 자신을 돌아봤다.
봉태규가 돌아왔다. 15일 개봉하는 '청춘 그루브'는 힙합그룹으로 데뷔를 꿈꾸던 청춘들이 3년 만에 섹스 테이프가 있다는 말에 같이 모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봉태규는 힙합그룹으로 성공하길 꿈꾸다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한 뒤 쓰레기통 같은 작업실에서 빛바랜 꿈을 붙잡고 있는 역을 맡았다.
봉태규는 '청춘 그루브'를 3여년 전 찍었다. 영화엔 20대 마지막 언저리에서 방황하던 봉태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코믹 배우 봉태규는 '청춘 그루브'에 없었다. 그냥, '아! 봉태규란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있었지'라고 떠올리게 만든다. 4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길게 나눴다.
-언제 제안을 받았나.
▶ 2009년이었다. 연극을 준비하던 중 적은 예산인데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존에 내가 했던 캐릭터와 달라서 좋았고, 성장영화를 해보고 싶었고, 그런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서 좋았다.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단 뜻인가.
▶ 이미지 변신이라기 보단 다른 것도 할 수 있는데 보여지는 건 코믹스러운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코믹한 이미지로 20대를 쉼 없이 질주했었는데.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게 싫었나.
▶ 인생은 타이밍 같다. 시트콤을 하고 '옥탑방 고양이'를 하고 '광식이 동생 광태'를 하고 '방과 후 옥상'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잘 된 반면 '바람난 가족'이나 '가족의 탄생'을 기억해 주는 분들은 많지 않다. 열심히 한 걸 후회하기 보단 타이밍이 그랬던 것 같다. '청춘 그루브'는 그런 고민이 정점이었을 때 만난 영화다.
-힙합청년을 맡으면서 절친한 사이인 타블로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했다. 희한하게도 타블로가 학력논란으로 힘들었을 때와 봉태규가 활동을 중단했을 때와 시기가 겹치는데.
▶ 그랬다. 타블로 형과는 서로 좋아하는 영화들이 같다는 걸 알게 되면서 친해졌다. 블로 형이 한참 힘들었을 때 그냥 형네 집에 가서 놀아줬다. 바로 앞집이기도 하고 해줄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고.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들었을 때 블로 형도 그렇게 나와 놀아줬다.
-오랜 동안 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아팠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 아팠던 것도 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아버지는 나를 항상 직장 다니는 매형들과 비교하시며 걱정하셨다. 이렇게 배우를 하고 있어도 직업인으로 인정을 못 받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고로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엄마가 단순한 사고를 오버해서 말하는 줄 알았다. 낯선 목소리로 전화가 와서 '지금 운전하고 있느냐. 놀랄 수 있으니 운전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자 비로소 믿겨졌다. 계속 자책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게 됐다.
-이제 다시 활동을 시작할 만큼 마음을 추스렀나.
▶ 5일 '청춘 그루브' 기자시사회에 가니 이제 때가 됐나보다란 생각이 비로소 들더라. 예전 같으면 기자시사회 전날에 밤새 긴장했는데 조금도 그런 마음이 안들어 아직도 준비가 안 됐나란 생각도 했는데.
-봉태규는 그동안 리액션보다 액션이 좋은 배우였다. 다른 사람의 연기를 받아주기보단 자기가 치고 올라가는 게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번 영화는 좀 다른 것 같다. 여전한 부분도 있지만.
▶ 맞다. 연극을 하면서 비로소 진짜 좋은 배우는 액션보다 리액션이 좋은 배우라는 걸 알게 됐다. 그전에는 온 힘을 다해야 잘 하는 줄 알았다. 선배들이 다 받아준 것도 모르고. 그래서 '청춘 그루브'를 할 때는 변성현 감독님에게 내가 후배들(곽지민, 이영훈) 연기를 다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삐칠 수도 있으니 그러면 달래달라고 했다.
-봉태규도 '청춘 그루브'에서 맡았던 역처럼 콤플렉스 덩어리인가.
▶ 그죠. 과거의 나는 '된다'라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배우들이 오디션 100번 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부러웠다. 얼굴사진 보고 프로필에서 떨어지니 오디션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차츰 이름이 알려지면서는 봉태규는 주인공을 해본 적이 없으니 안된다, 주인공을 하고 나니 원톱영화는 안된다, 원톱을 했더니 코미디 밖에 안된다란 소리를 들었다. 내가 욕심이 많았던 것도 내가 나를 몰아세우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봉태규는 어떤가.
▶ 오래 쉬면서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더라.
-허리 디스크로 군면제를 받았다. 합당한 이유지만 군 문제는 워낙 예민하다보니 그것 때문에도 활동 재개가 조심스러울 것 같은데.
▶ 아팠을 때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재활운동으로 치료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점점 더 악화되면서 의시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예민한 문제인 건 맞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보단 나 같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니깐.
-활동을 재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허리가 저렇게 멀쩡한데 군대를 면제받았단 말이냐고 할 수도 있다. 액션영화에 출연하거나 '가루지기'처럼 정력의 상징 같은 역할을 한다면 그걸 갖고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잇고.
▶ 그런 생각까진 해보지 못했다. 그런 우려 때문에 작품 선택에 방해가 될지, 나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홍봉진 기자 |
-'청춘 그루브' 엔딩이 신선했는데. 보통 성장영화와는 다른 결말이 인상적인데.
▶ 나 역시 그렇다. 이 영화는 꿈을 위해 달려야 하나, 현실과 타협해야 하나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현실과 타협해도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조급하지 말자란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에는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욕심이 상당했는데 쉬는 기간 많은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데.
▶ 다 내려놓은 건 아니다. 그저 20대 때 어깨에 올려놓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배우 봉태규와 인간 봉태규가 다르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당히 달라졌더라. 그 교집합을 찾고 있다.
-소속사 키이스트와 계약 기간이 곧 끝나는데.
▶ 재계약하기로 했다. 소속사에 정말 감사하다. 일을 쉬고 있는데도 믿어지고 기다려줬다.
-마라톤도 멈췄다가 달리면 제 페이스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주연까지 올라갔는데 이제 조연을 할 수도 있고. 또 달릴 수 있나.
▶ 달려야 한다면 달리고 싶고, 안되면 천천히 가고 싶다. 마라톤으로 이야기하면 내 목표는 순위가 아니고 완주니깐. 조연이면 또 어떤가. 무슨 차이가 있겠나.
-베드신을 잘한다는 이미지도 있는데. 이번에도 이영훈에게 조언을 해줬다고 하고.
▶ 그런 오해도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사실 제대로 베드신을 찍은 건 '바람난 가족' 뿐이다. 이영훈한테는 베드신은 빰 맞는 연기랑 똑같다고 했다. 너무 여배우를 배려하면 한 번에 오케이가 날 것을 계속 하게 된다고 말했다.
-오랜 연인인 이은과 결혼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을텐데.
▶ 20대 때는 아직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30대에 들어서는 아직 많은 나이가 아니라서 아직이라고 답한다.
-차기작은 정했나.
▶ 아직. 이제 다시 할 마음이 들었느니 노력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