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진 기자 |
이용주 감독은 살아남은 감독이다. 한 때 졸속으로 만들어졌던 공포영화들은 재능 있지만 데뷔를 못해 조바심을 냈던 많은 신인감독들을 사장시켰다. 한 편만 만들고 그 뒤론 소식이 끊긴 감독이 태반이다.
이용주 감독은 공포영화 '불신지옥'으로 인상적인 데뷔를 한 뒤 '건축학개론'으로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용주 감독은 살아남은 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연세대 건축공학과 90학번인 이용주 감독은 졸업한 뒤 건축설계사 사무실에서 3년간 일했다. 일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길을 모색하던 중 학창시절에 사진 동아리에서 즐겁게 지냈던 걸 떠올렸다. 동영상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고,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 서른 살이 넘어 막내로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 뒤론 지난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를 썼지만 아무도 선뜻 투자하거나 제작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출연하겠다는 배우도 없었다.
실의에 빠져있던 이용주 감독은 공포영화를 찾는다는 소리에 '불신지옥' 시나리오를 들고 고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를 찾았다. 비록 흥행엔 실패했지만 참신한 이야기로 영화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뒤 이용주 감독은 오랫동안 묵혀놨던 '건축학개론'을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하기로 마음먹었다. 포기했던 '건축학개론'은 그렇게 되살아났다.
-'건축학개론'은 96학번 연세대가 배경이다. 현재 배경에 엄태웅이 건축설계사로 등장하고. 이용주 감독의 과거가 많이 담겨있는데.
▶ 2003년 '살인의 추억' 연출부를 한 뒤 그 해 11월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를 탈고했다. 하지만 밋밋하다며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시나리오는 자신 있었지만 캐스팅이 안 돼 계속 엎어졌다. 그러다보니 캐스팅 트라우마가 생겼다. '불신지옥'을 하게 된 것도 공포영화는 캐스팅이 좀 쉬울 것 같았던 것도 이유다. 내게 '건축학개론'은 열면 안되는 상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캐스팅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수지,이제훈과 한가인,엄태웅으로 더블캐스팅을 했는데.
▶나중엔 인간이 캐스팅 때문에 미칠 수 있구나란 생각도 했다. 그러니 더블 캐스팅은 엄두도 안났다. 다행히 현재 구도로 구성된 다음 수지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초고를 썼던 2003년 수지가 9살이었다더라. 내가 너를 만나려고 이렇게 기다린 것 같다고 했다.
-어릴 적에 한 번쯤 이 다음에 커서 집을 지으면 2층집에 마당에 개를 키우고 거실엔 피아노를 놓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다. 집을 짓는다는 설정과 첫사랑의 감성을 연결한 게 색달랐는데.
▶처음엔 영화에서 집을 한 채 짓고 싶었다. 건축설계사 사무실을 다닐 때 못 이룬 꿈을 영화에서 이뤘다고 할까. 그리고 초고를 쓸 때 20대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96학번으로 설정이 바뀐 것도 제작이 지난해 이뤄지면서 바뀐 것이다. CD가 아니라 원래는 녹음 테이프였다. 그 시절엔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주지 않았나.
'건축학개론'으로 90,91년 내 대학 신입생 시절을 회상했다. 그 시절을 반성하는 느낌이랄까. 이제훈이 수지에게 꺼져버려란 말을 한다. 자기가 상처 받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냐. 20대의 그런 순수하고 비겁하고 잘 몰라서 상처줬던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수지와 이제훈이 정릉에서 개포동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 수지가 이왕이면 강남이 좋지 않냐고 하는 것 등을 놓고 강북,강남의 계급 차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릉에서 개포동까지 가는 건 내가 찍은 단편영화 '718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포동에 사는 아이가 버스종점인 정릉까지 가는 이야기였다. 계급은 글쎄, 어떻게 생각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건축학개론'은 대학교와 정릉, 개포동,도서실,제주도 등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감정을 풀어나가는데.
▶공간으로 이어가는 게 이 영화의 콘셉트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사진으로 찰나를 이야기하고, '봄날은 간다'가 소리를 들려줬던 것처럼. 공간은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
-파도소리나 '기억의 습작'이 인상적인데.
▶영화음악이 남용되는 것처럼 쓰이는 건 싫었다. '기억의 습작' 같은 경우는 음악길이에 맞춰 편집한 부분도 있다. 이야기와 음악이 맞아 떨어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허진호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데 과잉으로 치닫지 않는 게 취향인 것 같다.
사실 마지막 부분에 더 울려야 하지 않나란 생각을 했다. 지금 버전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흥행을 위해선 더 울려야 하지 않나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심재명 대표님이 "흥행이 뭐가 중요하냐며 좋은 작품이 중요하지"라면서 지금 버전으로 하자고 하시더라.
-'불신지옥'을 했던 감독이 '건축학개론'을 한 데 대해 의외라는 시선도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한 같은 게 있었다. 내 취향으로 영화를 만들지 못하나란 생각도 들었다. '건축학개론' 네티즌 평 중에 "명필름에서 많이 바뀌었구나"란 글도 있었다. '불신지옥' 때도 공포영화인데 왜 귀신이 등장하지 않나란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 많이 거절당하기도 했다. 같은 장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고 정승혜 대표와 심재명 대표, 두 제작자와 일을 한 게 행운이기도 할텐데.
▶그렇다. 다 거절할 때 이 이야기를 합시다라고 한 분이 심재명 대표고, 고 정승혜 대표의 유작을 했으니깐. '건축학개론' 엔딩 크레딧에 도와주신 분들에 정승혜 대표님 이름을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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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진 기자 |
▶맞는 말이다. 과거와 지금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나도 그 때에 비해 너무 많이 와버린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 때로 갈 수는 없으니깐. 그런 생각이 들어간 것 같다. 누구는 왜 수지 코에 한가인처럼 점을 찍지 않았냐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니깐.
-'건축학개론'은 이제훈→한가인→엄태웅과 수지로 시점이 이동한다. 하지만 그래도 클라이막스 키스신을 보면 결국 30대 중반 남성의 판타지란 생각이 든다. 알고보면 그녀도 내가 첫사랑이었다는 식이랄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런 평이 많더라. 아무래도 내가 남자라서 그럴까. 그 나이 때를 5춘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에 대한 반성이 담겨있는 감성의 멜로랄까.
-현재 키스장면과 과거 시절 수지 방에 선배가 들어간 장면은 관객의 상상력에 그 이후를 맡기는데.
▶키스신은 장르의 최소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두 장면 그 이후는 보는 이의 성 윤리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배우들이 과거와 현재가 다르니 조절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한가인은 드러내지 않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여배우가 해도 힘든 역을 잘 소화해냈다. 얼마나 그 역이 힘든지 잘 알기에 그 역과 그 역을 소화해야 할 한가인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엄태웅한테 미안했다. 이제훈은 정말 탁월했다. 프로야구 선수로 치면 류현진 같다고 할까. 완성된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라. 수지는 정말 열심히 하는 배우다. 가장 연결을 잘 해내는 배우고. 자기 콘티를 두고 간 적이 있었는데 스태프들이 보고 다 놀랐다. 학생이 교과서에 적어놓듯 빼곡하게 어떻게 연기하고 뭘 물어봐야 할지가 다 적혀있었다. 수지와 한가인은 테이크를 뒤로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배우다.
-납뜩이 역할 조정석은 애드립이었는지, 어떻게 연기를 조절했나.
▶조정석은 어마어마한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처음에는 납뜩이 역 하기에 너무 훈남이어서 고민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카메라를 낯설어 하더니 바로 적응해서 애드립까지 쏟아내더라.
-좋은 집을 짓는 것과 좋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좋은 집은 시간을 잘 먹은 집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에 중축을 하는 것도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건축가는 땅을 탓하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도제 시스템도 비슷하고. 건축가가 엔지니어와 미학의 중간에 있다면 영화감독은 미학과 상업 밸런스를 맞춘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음 영화는 어떤 이야기가 될 것 같은가.
▶'불신지옥'은 데뷔에 대한 갈망이 있는 영화였다. '건축학개론'은 한이 있는 영화고. 다음 작품은 그런 부채감이 없을 영화라 그래서 나도 궁금하다. 모르지, 이번 영화가 흥행이 안되면 흥행에 대한 강박은 갖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