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잇뷰티' ⓒ온스타일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 사촌이 땅을 사면 나도 사면 된다. 따라하기라고? 유식한 말로 벤치마킹이라는 거다. 남이 일단 블루오션을 만들어 놓았으면 일단 한 발 걸치고 보는 게 상책이다. 내가 돈이 있든 없든 그건 나중 문제다. 그게 나중에 레드오션이 되는 것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때 하루 빨리 빠져나오면 된다. 우선은 내 배 아픈 걸 막는 게, 그 검증된 블루오션에서 떡 고물 하나라도 먼저 챙기는 게 최선이다.
최근 몇 년간 TV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왜 이 '2명의 사촌'이 생각났을까. 하긴 영화도 그랬다. 핏빛 스릴러가 잘 된다 싶으면 꼭 비슷한 내용의 2, 3편이 연달아 기획돼 비슷한 시기에 개봉, 서로 죽을 쓰곤 했다. 한때 광풍처럼 몰아닥친 코믹 조폭영화 열풍이 그랬고, 근세 대한제국을 무대로 한 일련의 기획 장르영화 선풍이 그랬다. 그리곤 서로 공멸했다.
지금은 케이블TV 얘기다. 1995년 출범 때는 물론이고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케이블TV는 방송계에서 '마이너'이자 '서자' 취급을 받았다. 영세한 규모에 내세울 것은 '다품종 소량'일 뿐인 전문점에 일부 마니아들만 찾는 곳이라 여겼다. 잘 나가던 스타들이 케이블TV에 MC나 게스트로 나가면 '한 물 간' 것쯤으로 여기는 몹쓸 풍토도 있었다. 물론 가구 시청률도 지상파TV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바뀌었다. 이제는 국내 메이저 지상파 3사인 KBS, MBC, SBS와 그 계열 케이블 채널들이, 아이디어가 빛나고 추종자들이 늘어나며 시청률까지 높은 케이블TV 프로그램은 너나할 것 없이 '벤치마킹'하는 시대가 됐다. '대국민 오디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엠넷 '슈퍼스타K'의 초대박 성공 이후 지상파에선 '위대한 탄생'과 'K팝스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탄생했다. 그리고 '슈스케' 심사위원들의 독설과 악마의 편집은 이들에게 바이블처럼 읽혀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오디션 및 경연 열풍이 식지 않자 KBS는 예전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슬그머니 폐지했던 '불후의 명곡'을 부활시켰고, MBC 역시 슈퍼키드, 스윗소로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느닷없이 폐지됐던 '쇼바이벌'을 '나는 가수다'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이 중 'K팝스타'는 보아, 박진영, 양현석이라는 빅3 카드를 심사위원에 포진시키면서 '슈스케'를 위협할 정도로 '최강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형보다 나은 아우를 꿈꾸는 이 같은 '사촌 2명'은 요즘 뷰티 프로그램에서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다. 역시 첫 단추는 케이블TV에서 꿰었다. 지난 2010년 온스타일에서 S.E.S의 유진을 내세워 '겟잇뷰티'라는 당시만 해도 생소한 이름과 컨셉트, 포맷의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하지만 국내 처음으로 화장품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하고 이를 통해 예상치 못한 반전과 편견 깨기가 속출하면서 '겟잇뷰티'는 20, 30대 여성들의 필수 시청 프로그램이 됐다.
역시 다른 사촌들은 그냥 있는 법이 없었다. 올 들어 3월 KBS드라마가 야심차게 여배우 박은혜를 주축으로 한 '뷰티의 여왕'을, SBS플러스는 패셔니스타 서인영을 내세워 '스타 뷰티쇼' 방송을 시작했다. 두 프로그램 모두 '겟잇뷰티'와 차별성을 피력하며 자신들만의 셀링 포인트를 강조하지만, '겟잇뷰티'의 성공에 자극 받아 출범한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 시청자들은 헷갈린다. '슈스케'나 '겟잇뷰티'를 볼 것인지 아니면 'K팝스타'나 '스타 뷰티쇼'를 볼 것인지. 아니 헷갈릴 필요도 없다. 원래 소비자로서 시청자들은 열혈 마니아가 아닌 이상 '재미있고 도움 되는' 프로그램을 시간을 투자해 보면 그만이다. 원론적인 '원조' 대접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TV프로그램 시장이든 다른 어느 시장이든.
하지만 원조 프로그램의 작가, 연출자, 스태프는? 최소한 국내에서는 없었던, 그리고 그 성공여부가 지극히 불투명했던 '원조' 프로그램을 짜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가슴 졸였던 그들의 '기회비용'은 누가 보상을 해줘야 하나. '친구도 아닌데 강남 따라온' 사촌2는, 먼저 땅을 사기 위해 살뜰히 계획하고 알뜰히 저축했던 사촌1을 과연 '나몰라'라 할 수 있을까.
맞다. 꼭 영화나 TV판만이 아니다. 세상 어디가 무대이든, 이런 사촌2, 사촌3이 많아질수록 제 인생 전부를 건 '창작자'와 '모험가'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