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형 <사진제공=해피로봇레코드> |
'사람은 저마다의 향기를 찾아 노래한다.'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누구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이 화면 가득 채우자 그제야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음악에 푹 빠져 살았던 한 청년이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며 인생을 배워간다는 내용. 특수효과도 파격적인 줄거리도 없었지만, 험난한 세상에 욕을 퍼붓는 솔직한 청춘 스토리다. 싱어송라이터 이지형이 영화 한 편을 소개했다. 제목은 '내 청춘을 소개합니다'. 물론 실제로 이런 영화는 없다.
홍대에 인디신이 자리 잡기 전부터 주인공 JH는 바쁘게 움직였다. 때는 1992년. 중학생 JH는 동네에서 가장 멋진 형 A의 기타 치는 모습에 반해 3만5000원의 거금을 털어놨다. 그리고 매일 밤 골방에서 셀프 기타레슨은 시작됐다.
"당시 제 음악 선생님은 형이었어요. 한대수 동물원 김광석 봄여름가을거울 김현식 등 좋은 음악을 소개 받고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했죠. 그땐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나 뭐라나. 하하.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밴드를 꾸렸죠."
JH의 첫 밴드는 너바나의 카피밴드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너바나 음악을 듣고 받았던 충격은 고등학생 10명을 록의 세계로 이끌었다. 커트 코베인 덕분에 겉멋도 꽤나 부렸던 시절이다. JH는 마냥 음악이 좋아 음악 본질에 충실했던 소년이었다.
1996년 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JH는 그간 호흡을 맞춰오던 자신의 밴드 위퍼를 이끌고 홍대 앞 클럽 문을 두드렸다. 홍대 인디클럽 문화의 시작을 알린 '드럭'에 들어선 것. 뭔가에 홀린 듯 동물적인 감각으로 기타를 잡았던 JH에겐 음악은 그냥 놀이터였다. 그 때만 해도 진짜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노래할 친구가 없어 제가 잠깐 마이크를 잡았는데 결국 지금까지 노래하게 되네요. 성공 보다는 그냥 노는 게 좋았어요. 너바나란 환상, 얼터너티브 록에 대한 존경, 당시 했던 무거운 음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헤드뱅잉 하던 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버겁네요.(웃음)"
그렇게 이지형의 음악은 클럽에서 시작됐다. 너바나의 겉옷을 잠시 빌려입고 음악은 거친 록에 초점을 맞췄다. 도전, 젊음, 청춘, 위로, 일상, 커피. 싱어송라이터 이지형의 음악을 설명하는 키워드. 어째 그의 음악은 날 선 청춘과 꽤 닮아있었다.
▶1997> V.A : Our Nation 2 (No Brain & Weeper)
JH의 젊은 피가 요동치던 시절. 라이브클럽 드럭에서 차세대 인디밴드로 주목받던 때다. 인디신에서 핫한 노 브레인과 함께 한 위퍼의 첫 음반에서 JH는 풋풋하지만 거친 질감의 음악을 쏟아냈다. "너바나의 에너지와 닮았지만,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록을 동경하던 시절이라 풋풋하기만 하죠. 인디라는 말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이었으니깐, 홍대 인디신이란 말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깐 뭐 이럴 수도.."
▶2001> 위퍼 1집- 상실의 시대
인디신에 음악적 진중함과 진정성을 채워준 의미 있는 음반. 음울하면서도 은유적인 노랫말에는 패기 있는 젊음이 담겼고 폭발적인 음악은 철저히 젊은이들의 멋을 추구했다. 홍대 클럽을 중심으로 한 인디 록 무브먼트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릴 때, 감히 말하자면 인디문화의 시작에 야심찬 출사표를 던진 시기를 함께 한 앨범이다.
"제 음악에 대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때로 기억나요. 내 정체성에 눈 뜨려고 할 때 만든 음악들. 뭔가 세련되고 그럴 듯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첫 시도였고, 록 음악을 하면서도 저만의 색깔을 찾고자 발버둥 쳤던 음악들이죠."
음악과 함께 보낸 JH의 어린 시절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닮고 싶어 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동경했고, 그의 음악은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었다. 끝없이 흔들리고 방황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건강했던 기억이다. 내 안에 나를 찾아가는 과정,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이 과연 잘 그린 것일까 못 그린 것일까'(3집 '청춘 마끼아또 中 '내가 그린 기린 그림')
▶2006> 이지형 1집- Radio Dayz
팝과 록의 모호한 경계를 꽤나 영리하게 지나쳤다. 위퍼 활동을 마치고 통기타 하나만 들고 다시 홀로 무대에 섰다. 이제부터는 생존의 갈림길이다. 앨범의 첫 곡 'Nobody Likes Me'(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처럼 외로움도 극에 달했다.
"삶은 외로움"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 그는 세상을 향해 칼날을 들이댔다. 이러한 정서는 줄기를 따라 가지가 나오듯 앨범 사이로 퍼져나갔다. 차갑게 마주한 시선, 하지만 멜로디는 달달하다. 노랫말은 외로운 줄타기를 하지만 음악은 부드럽고 감미롭게 타협했다. 생계의 어려움에 놓인 마지막 앨범이란 각오로 만든 앨범이다.
"이봐! JH! 여기에선 공연 하면 안 돼. 자네, 이제 밴드도 아니잖아. 통기타 하나 들고 와서 무슨 공연을 하겠다고 그래? 여긴 라이브 록 클럽이야. 미사리로 가!" 밴드의 강한 음악을 하다가 팝 록 음악으로 노선을 바꾼 건 5년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 목소리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한 결과다.
"창작의 고통은 없었지만 제작의 고통은 엄청 컸어요. 녹음하는데 돈이 없으니 여기저기 전전긍긍했죠. 정말 배고프게 음악 했던 시절이었고, 매일 같이 돈 꾸러 다녔던 기억뿐이네요. 30대 전 제 이름으로 된 앨범으로 명함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죠. 그냥 제 이름 석 자로 이지형의 명함을 파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앨범은 대박이 났다. 이후 인디신은 물론 방송사 스케줄, 행사 등 정신없이 바쁘게도 뛰었다. 인디신을 흔든 이 음반은 미안하지만 '대충' 만든 앨범이다. 말이 좀 과했지만, 사실 공 들여 만들지 않았단다. 어쩌면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앨범일 수도. 하지만 반란을 일으켰다. 구박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를 찾기 시작했고, 인디신이 낳은 핫 스타가 됐다. 거액을 들여 사운드를 성형시키고 뮤직비디오를 블럭버스터급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결과는 월등했다. 숨통이 트였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상 최다 노미네이트는 물론 남자가수상도 거머쥐었다. JH는 8개월 만에 여기저기서 꾼 돈을 모두 갚았다. 단순히 명함 하나 만들자고 했던 건데 되돌아 온 것은 꽤나 가치 있는 일들이었다. "아~내 음악이 이제야 날개를 달았구나"
▶2007> 이지형 소품집 1 - Coffee & Tea - Barista Muzic Vol.1
JH의 또 다른 취미는 맛있는 커피를 찾아 카페를 돌아다니는 거다. 오죽하면 레이블 이름이 '바리스타 뮤직'일까. 홍대에 카페도 별로 없었고 커피가 지금처럼 대중화되기 전, JH는 찻잔을 들고 나름 허세도 부리면서 커피향에 취했다. 그래서 카페, 커피와 어울리는 소품집을 기획했다. 어쿠스틱 기타만 들고 노래하는 게 제법 어울렸다. 편한 음악만큼 편하게 음악과 어우러졌다. 작품성도 생각하진 않은 앨범이란다.
"뭔가 모자라 보이게끔 만들고 싶었어요. 정리가 안된, 제 직감에 충실한 음악, '그냥 이 정도면 되겠지?'란 생각으로 만든 앨범이죠. 사이먼 앤 가펑클에 빙의된 듯한 저만의 뉴웨이브 포크라고나 할까요?"
▶2007> 토이 - 뜨거운 안녕
지금의 이지형을 대중에 제대로 알린 곡. 3~40명이 오디션을 봤지만 주인공을 찾지 못했던 유희열이 이승환의 소개로 이지형에 마이크를 맡겼다. 당시 MBC '음악캠프' 등 방송사 음악 프로그램부터 라디오까지 아이돌 못지않은 스케줄을 보냈다.
▶2008> 이지형 2집 - Spectrum
이지형은 대중과 마니아의 경계선에 묘하게 걸쳐있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다기보단, 온전히 제 자리에 안착한 분위기다. 자신만의 영역이 있다고나 할까. 뿌리는 흙에 있지만, 잎사귀는 태양을 향해 뻗어있는 꼴이다.
밴드 위퍼의 거친 정서를 떠나 솔로 아티스트로서 매력적인 조각상을 세웠다. 힘이 있고 선이 굵은 음악을 하던 이지형은 마초적인 매력과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넘나들었다. 때론 경쾌하고 때론 감미롭지만 록의 본질 자체가 갖는 질감은 여전했다. 본능에 의한 음악이기에 날 것이란 느낌이 있었다.
본능에 충실했던 전작에 비해 이 앨범은 꾹꾹 눌러쓰듯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인디와 오버의 가교 역할을 기대하는 음악신을 위해 찬찬히 돌아봤다. 마치 노라존스의 포크와 하드한 브리티쉬록의 중간다리를 놓은 것처럼. 이지형은 그간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면서 맺은 이적 하림 유희열 이한철 등과 그 다리역할에 충실했다.
"제 성장과 가치관에 변화를 받아드린 뒤 이지형의 성장, 그리고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힌 음반이에요. 다양한 시도가 만족스러웠던 시기였죠."
▶2010> 이지형 소품집 2 - 봄의 기적
꾸준히 자신의 길 한가운데를 지키며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 이지형은 3집을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소품집을 준비했다. '봄'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쓸쓸한 가을과 시린 겨울을 지나 찬란한 봄을 맞이하는 여정을 그려냈다. 계절의 색이 바뀔 때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 결국 봄을 됐을 때 기적의 날에 대한 기록이다.
평소의 발성과 다르게 목소리에서 힘을 많이 뺐고, 음역대를 낮추어 바로 옆에 앉아 기타연주를 하듯 이야기를 전했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만들어낸 담백한 힘에서 새로운 출발선을 그려낸 음반이다. 그 사이 JH는 오랜 연인과 결혼했다.
"결혼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됐다는 생각에 새로운 시선이 생겼어요. 뭔가 철이 들고 나서 만든 앨범, 그전엔 생존에 목마른 집착을 했다면, 이제 여유 있게 가사도 다시 체크해보고 음악을 곱씹어 보게 됐죠. 어른이 된 음악이죠."
▶2012> 이지형 3집 - 청춘마끼아또
어느덧 JH는 35살이 됐다. 기억 속 공간이 내면과 충돌하면서 여유롭게 추억을 돌아보게 됐다. 추억이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증언한 새 음반이다. 언젠가부터 타성에 젖어 음악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 JH는 홀연히 떠났다. 꾸준히 앨범을 내고 '뜨거운 안녕'을 부른 후 유명세도 얻고 나니 나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만, 음악에 대한 한계와 더 이상 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단 위기감도 느꼈다.
일기장을 펼쳤다. 아버지가 작은 상자에 보관해둔 옛 러브레터와 메모 종이와 사진을 쳐다보고 있자니 20대의 청춘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에 들려줄 내 청춘의 기록을 음악으로 들려주자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긍정적인 내용이 가득하죠. 좋은 얘기만 들려주고픈 아버지의 심정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젊은 시절에 비겁했던, 사랑과 이별에 고개 돌렸던, 무참히 짓밟혔던 기억도 제 추억이잖아요. 나중에 직접 들려주기 힘든 얘기를 가감 없이 담고 싶었죠. 먼 훗날 이 앨범이 저와 아들이 소통할 수 있는,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되길 바랍니다."
분명 청춘을 주제로 담고 있다. 철저히 이지형의 청춘 얘기다. 하지만 청춘 뒤에는 '마끼아또'란 단어가 붙었다. '얼룩'이란 의미의 이탈리아어 '마끼아또'가 더해져 얼룩진 청춘을 표현했다. 희망찬 청춘 보단 솔직한 젊은 날을 아들에 보여주고 싶었던 그다. 첫 경험에 대한 솔직한 후기('열아홉 밤공기')를, 무엇 때문에 힘든지 모르는데 그저 힘들었던 시절을('청춘표류기'), 사랑 앞에서 제대로 용기내지 못했던 모습을('사랑해버렸네'), 첫 이별의 괴로움을('병든 마음') 용기 내 담았다.
이지형 <사진제공=해피로봇레코드> |
낯설지만 청량한 멜로디들과 물기 어린 사운드가 귓가를 자극한다. 상쾌하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한 음악, 청순함과 독기가 공존하는 롤러코스터 음반. 젊은 날의 정서와 추억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청춘이다.
JH가 생각하는 청춘은 "그래, 넌 이겨낼 수 있어. 누구나 그랬단다"란 어른들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솔직히 "그래, X같다. 너도 그래? 나도 짜증나"란 공감이다. '단 한 번도 난 끝까지 날 믿어본 적이 없어. 흔들리고 휘청이다 결국에 난 너의 뜻대로..'('청춘 마끼아또中) '아들아, 할 수 있어' 보단 '난 세상에 비겁했어'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식.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남 얘기에 귀 기울였던 청춘이다.
청춘에 대한 소박한 찬사, 함께 동시댈 살아가는, 그리고 새 시대를 맞이할 이들에 묵묵히 안내서 역할이 되어 준다면 두말 할 필요 없이 기쁘단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의 JH, 그의 두 팔엔 아들이 곤히 잠들고 있다. 내 아들이 언젠가 내 음악을, 내 음반을, 내 청춘을 곱씹어 보고 있겠지? 그걸로 됐다. 아들이 나를 통해 세상과 마주하는 패스워드를 찾는다면, 그걸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