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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사진=최부석 기자 |
재중동포 장률 감독(51)과 부산영화제의 인연은 남다르다. 2004년 '망종'이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을 통해 부산영상위원회상을 받았고, 추후 제작되어 이듬해 부산영화제에서 뉴커런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두만강'으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넷팩상을 수상했고, 김동호 명예 집행위원장의 첫 연출작인 '주리'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부산영화제와 벌써 10년의 세월을 함께한 장률 감독이 올해는 첫 다큐멘터리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을 통해 제작한 단편 다큐멘터리를 장편으로 재구성한 '풍경'이다. 또 한 번 부산을 방문한 장률 감독은 "부산영화제는 낯설지가 않다. 술도 마시고 싶고"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리' '경계' '두만강' 등 주로 극영화를 연출했던 장률감독, 다큐멘터리에 도전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주어진 시간도 짧았기에 더욱 고민이 많았다.
"처음에 삼인삼색을 제의 받았을 때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떠오르는 단편 극영화 이야기도 없었고요. 계속 다큐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짧은 시간 내에 단편 다큐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찍다보니 호흡이 길어져서 단편도 나오고 장편도 나왔어요. 영화의 호흡은 장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장률 감독이 받은 주제는 '이방인'. 그는 수많은 이방인들 중 경기도와 서울 곳곳에 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조명했다.
"한국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특정 지역에 가면 거리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 많기도 하죠.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풍경이 돼버렸어요. 그것을 스쳐 지나가는가, 유심히 보는가의 차이였죠. 이미 그곳에는 이 주제로 몇 십 명의 감독이 다큐를 찍고 있었어요(웃음). 대부분 저처럼 빨리 찍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가지고 찍고 있었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간단히 허락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하고 '인상 깊은 꿈이 뭔가?'라는 질문 딱 하나만 물어봤어요. 그렇게 해서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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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사진=최부석 기자 |
단 하나의 질문은 '한국에서 와서 꾼 가장 인상적인 꿈은 무엇인가?'였다. 수많은 이야기 중 그가 꿈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보통 질문을 할 때는 질문하는 사람이 강자예요. 일단 질문을 하는 사람보다는 받는 사람이 불편하죠. 꿈에서는 강자 약자가 없어요. 누구나 평등해요. 부자라고 좋은 꿈을 꾸는 것도 아니죠. 꿈은 누구나 평등하지만 어느 구석에는 일상과 연결되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꿈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했어요. 영화를 볼 때도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혼동이 오는 것을 좋아해요."
장률 감독의 '풍경'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로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감독은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겠다는 주인공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시간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약속한대로 해야 하니까(웃음). 꿈 얘기 외에 한 마디라도 더 물어보면 깨질 수도 있어요. 제 영화가 고발하는 영화도 아니고요. 노동의 장면은 아름다워요. 익숙하지 않고요. 그런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는 거죠. 거리에 나온 피곤한 모습이 아니라 일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았어요. 사람은 집중할 때 아름다워 보이고 빛나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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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사진=최부석 기자 |
그냥 가만히 지켜보던 중 의외의 즐거움이 생기기도 했다. 사진관에서 하루 동안 카메라를 두고 찍은 장면에서는 사진관 사장님의 화술 덕에 재미있는 장면들이 탄생했다.
"노동자들이 사진관에 와서 사진을 찍는 것도 풍경이잖아요. 사진 자체도 풍경이고요. 요즘은 사진관이 점점 적어지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특정지역에는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것도 굉장히 감동이 되는 풍경같이 보였어요. 말씀을 많이 하시는 사장님 덕에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도 생겼죠."
인터뷰 중 문득 궁금해졌다. '이리' '경계' '풍경'과 신작 '경주'까지. 장률 감독의 영화에는 대체로 두 글자짜리 단어로 된 제목이 많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그는 "제가 제목을 잘 못 지어요"라며 웃었다.
"제목을 짓는 것이 어려우니까 포기한 결과죠(웃음). 저를 대신해서 제목을 고민해주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 친구들이 정작 정해오면 제가 맘에 안 들어요. 저는 제목 안에 감독의 태도가 들어가는 걸 싫어해요. 제 마음에 드는 제목은 감독의 태도 없이 그저 제목인 것이에요. 영화에 대한 태도나 감상은 관객이 영화를 본 다음에 가지는 것이죠."
첫 다큐멘터리의 제목인 '풍경'의 의미를 이어 물었다. 그는 "좋아하는 풍경에만 충성해도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풍경이라는 건 거리가 있어야 풍경이잖아요. 실제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 가깝게 들어갈 수가 없어요. 사람과 사람도 가깝게 느끼는 것이 착각일 수 있죠. 유심히 보는 풍경을 굉장히 소중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충성해도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당신의 꿈 속 풍경은 무엇이냐, 그런 의미이기도 하죠."
영화 '경주' 촬영을 마치고 곧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장률 감독, 그의 다음 다큐멘터리도 만날 수 있을까.
"찍고 싶은 주제는 많죠. 살다가 어느 공간이나 사람이나 감동이 되고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남아 있는 그러한 것은 다 찍고 싶어요.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잖아요. 극영화는 아무 근심이 없었는데 다큐멘터리는 근심이 많았어요. 이제 한 번 해봤으니까 다음부터는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