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동 요나컴퍼니 사무실에 걸려있는 고 배우 박용하의 사진들 /사진=문완식 기자 |
고 배우 박용하의 전 매니저 A(33, 여)씨가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사기미수, 절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지난 14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 11월 15일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법정구속, 서울구치소에서 3개월간 수감된 지 3개월만이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고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으나, 사기가 미수에 그치고 훔친 물품을 모두 유족에게 반환한 점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씨는 지난 2010년 6월 30일 박용하가 사망하자 일주일 후 일본 도쿄의 한 은행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박용하 도장을 이용해 예금청구서 2장을 위조, 2억4000여만 원을 인출을 시도하고, 고인이 설립한 기획사 사무실에서 고인의 사진집 40권과 2600만원어치의 음반, 사무실 비품, 카메라, 사진 등을 훔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A씨가 예금청구서를 위조하고 인출하려고 한 금액 등을 고려할 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고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절망감에 빠진 유족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이어 "A씨가 충분히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직을 유지하기 쉽지 않게 된 점, 사기가 미수에 그치고 절도한 물품을 모두 반환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실형 유지는 가혹하다"며 집행유예를 선고 이유를 밝혔다.
A씨에 대한 집행유예가 선고된 날 저녁 서울 잠실동 요나컴퍼니에서 고 박용하의 매형 김모씨와 과 누나 박모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1년이 넘는 재판 기간을 마무리하면서 할 얘기가 많아 보였다. A씨에 대해서는 "안타깝다"고 하면서도 집행유예로 끝난 법의 심판을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난 2010년 6월 30일 박용하가 숨진 이후 이날까지 두 사람이 왜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법의 심판을 받으려했는지를 말했다. 인터뷰는 2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김씨와 박씨의 주장을 가감 없이 옮긴다.
"범행 후 회사 자료를 가지고 태국·사이판으로 한 달간 잠적"
"용하가 갑자기 그렇게 되고 불과 일주일에서 보름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A씨가 저지른 일들을 저나 집사람이 거의 알고 있었지만 그 때는 경황이 없었다. 용하가 그렇게 떠났는데 공개적으로 언론에 알리면서 또 한 번 고인의 이름을 나오게 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용하도 그렇게 됐고, 가족들도 당시 힘들었다. 아버지도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상황이셨고.
김씨와 박씨는 사실 A씨를 법의 심판에 올릴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박용하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용하 사후 A씨가 주위에 하는 말들이 두 사람을 격분케 했다. 고 박용하와 가족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 A씨가 2011년 7월에 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한 아이돌그룹의 매니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주변인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 사실이 아닌 얘기를 하고 다니더라. 심지어 가족들 관련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인양 떠들고 다녔다.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고 자기는 매니저의 권리로서 했는데 가족들이 자기가 횡령, 절도를 했다고 하고 다니면서 자기를 괴롭힌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많은 얘기를 하고 다니더라. 참 심각한 상황이었다.
박씨는 "장례식장에서부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나쁜 사람이 돼 있었다. 그때는 A씨가 하는 행동들과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알게 됐고 1년여 후부터는 더 자세히 알게 됐다. 그 1년여의 기간 동안 A씨를 여러 번 만났는데 전혀 반성이나 미안한 마음은커녕 너무나 당당했다"고 했다.
김씨와 박씨는 2011년 11월 검찰에 진정서를 냈고, 이후 A씨에 대한 검찰의 조사와 기소, 재판이 진행됐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 2010년 6월 30일에 박용하가 사망하고 7월 7일에 A씨가 일본에 가서 횡령 미수를 했다. 법원에서는 2억4000여만원(1800만엔)만 다뤄졌는데, 그 외 6000여만원(400만엔) 인출한 게 또 있다. 이 400만엔은 A씨 명의의 통장에 있는 돈이었는데 실제로는 회사자금으로 회사에서 관리하던 돈이다. 그걸 사건이 벌어진 7월 7일 같은 날 인출해갔다. 회사에 관여를 안했던 우리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일본 회사와 일처리 하는 도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됐다. 한 달 후에 태국에서 돌아온 A씨를 만나 그 얘기를 하니 용하가 세상 떠나기 전 '그거 너 가지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자기가 가져갔다고 했다.
-박: 그 돈은 회사 돈 아닌가. 8월 중하순께 돌려받았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의 돈인데 준다고 하더라. 뿐만 아니라 A씨가 가지고 가서 돌려주지 않았던 회사 법인도장, 법인인감, 통장 등을 태국에서 돌아온 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미수에 그친 2억 4000만원, 1800만엔은 1엔 단위까지 정확히 적어 은행에 냈을 정도로 모든 걸 가져가려했다"라며 "그런데 우리가 마음 아픈 것은 그 2억4000만원 보다 다른 것에 있었다"고 했다.
"절도 물품, 돌려받은 것 아니라 우리가 찾아온 것"
-김: 7월 14일에 A씨가 오후 3~4시에 서울 청담동 사무실에 와서 난리를 치고 나간 후 오후 7시쯤에 다시 들어와 한 5시간에 걸쳐 A씨, B씨, C씨, D씨 등 4명이 사무실 집기와 회사 서류 등을 가져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데 수십 차례에 걸쳐 5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물건을 나르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박스로 30박스가 넘는다. 우리가 분노하는 건 이때 용하의 CD나 화보집, 트로피 같은 유품들까지 싹 가져간 것이다.
-박: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2개를 버렸는데, 회사서류를 파쇄한 거였다. CCTV를 확인하고 쓰레기장에서 가져왔다. 이건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A씨는 범행 이후 자기 밑에서 매니저 일을 하던 B씨와 함께 절도한 회사의 자료들을 가지고 한 달 동안 태국과 사이판으로 잠적했다.
-박: 이후에 메일로 태국에서 연락이 왔다. A씨와 B씨의 퇴직금 달라고. 그 메일이 오기 전에 다른 직원들은 퇴직금 다 정산을 해줬으니 A씨도 퇴직금 당연히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저지른 상태에서 어찌 그렇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지. 계좌이체 해달라는 데 얼굴보고 주겠다고 받으러 오라고 했다. 며칠 후 B씨가 본인의 퇴직금을 달라고 왔더라. 퇴직금을 지급한 후 가져간 회사의 자료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회사 그 자료가 A씨의 집에 있다고 해서 B씨와 함께 A씨의 집에 갔다. 그 집에 가니 같이 절도를 한 D씨가 그 집에 있었고 기가 막히게도 회사에 있던, 사라진 용하의 물건이 거기에 다 있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우리 물건이니 자력구제로 가져올 수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A씨가 자기가 유족에게 돌려줬다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찾아온 것이다. 아직까지도 A씨가 왜 물건을 가져갔는지, 짐작은 가지만, 직접 설명은 못 들었다.
◆2010년 6월 30일 박용하 사망 당일
-박: A씨가 장례식장에서부터 대표를 바꾸자고 했다.A씨가 장례식 치르는 동안 나에게 꺼낸 얘기 중 하나가 대표 바꾸자는 얘기였다. 회사 상황을 얘기하면서 큰 일 날것처럼 얘기하더라. 당시 회사 대표 명의가 용하 어머니 명의로 돼 있었는데 그 당시 얘기하는 게 아버지 명의로 바꾸든지 하자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당시 병중이라 호스피스병동에 계셨다. 아니면 A씨 자기 명의로 하자고 하더라. 경황이 없는데 지금 회사명의 바꾸는 게 뭐가 중요하냐 우선 용하 잘 보내고 차차 상의하자고 했다. 속으로는 '이 상황에 이 얘기가 나와야하나' 생각했다.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2010년 7월 1일 박용하 발인 전날
-김: 집사람과 나는 이날 새벽에 일산과 분당에 장지를 보러 다녔다. 어머니는 갑작스런 큰일에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입원하셨다. 이날 한 일본팬(A씨와 친하다. 박용하의 열렬한 팬이라 사망 소식에 급하게 한국에 왔다. 법정에서 이 팬이 서면으로 증언을 제출했다)장례식장에 와서 가족들이 없는 게 의아해 A씨에게 물었더니 어머니는 쇼핑을 갔고 누나와 매형은 밥 먹으러 가서 자리에 없다고 했다더라. 그 당시에 그 일본 팬은 가족들이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박: 그런 게 우리를 화나게 하는 부분이다. A씨가 우리가 장지를 보러 가는지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날 내게 언니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했다. 언니 장지 잘 다녀오시라고, 자리 잘 보고 오시라고.
-김: 가족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 만들면서 장례기간 중에 알만한 연예인들이 들어오면 갑자기 품에 안겨 울고 그러더라. 만감이 교차했다. 장례식장에 오신 분들이 A씨가 왜 이리 오버하는지 의아해하더라. A씨가 누가 오기만 하면 쓰러지고 붙잡고 울고 하니까.
-박: 우리가 이 사건을 법에 호소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연예계에서 일하면서 제2, 제3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서울 잠실동 요나컴퍼니 사무실에 있는 고 배우 박용하의 유품들(위)과 고인의 팬들이 보낸 팬레터(아래). 팬들은 고인의 사후에도 여전히 팬레터를 보내고 있으며 요나컴퍼니는 이를 계속해 모아두고 있다. /사진=문완식 기자 |
◆다시 6월 30일 박용하 사망 당일
-박: 갑작스런 일에 정신없는데 A씨가 제게 B씨를 데리고 가서 오빠 컴퓨터에 오빠가 자신의 장지를 결정한 곳이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하더라. 그날 밤 12시에 용하집(논현동)에 갔다. 이때 B씨가 용하 물건, 컴퓨터, 가방, 핸드폰 이런 걸 다 가져갔다. 난 경황이 없었고 필요하다고 하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용하 발인 날(7월 2일) 늦은 밤에 A씨에게 전화가 왔다. '박용하의 집 문 좀 열어 달라'고 하더라.
A씨가 매니저니 원래 집 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망 당일 어머니가 남편에게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바꾸고 나왔다. 그러니 A씨가 들어갈 수 없었겠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자기가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 물건은 어머니가 처음 만지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대충 정리했다고 안 열어줬다. 그리고 용하가 떠난 순간부터 이상한 일들이 많았기에 더욱더 열어 줄 수가 없었다.
집요하게도 다음날 새벽 5시에 전화를 해 집 앞이니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A씨를 만났다. A씨는 회사 얘기를 하면서 회사 통장이라며 2개를 보여주더라. 딱 2개였다. 말이 되나. 속으로 '아, 너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구나, 회사에 통장 2개만 있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확인하니 회사 통장이 훨씬 많았다.
◆2010년 7월 7일 A씨 일본 은행에서 인출 시도
-김: A씨가 7월 7일 밤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와 우리집에 밤 11시쯤 와서 30분 정도 얘기를 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콘서트가 중단돼 수십억 원의 손해가 났다고 했다. 헌화식을 하는데 아주 조그만 규모로 스태프만 모여서 하고 가족들은 없이 한다고 했다. 그 다음날 가족과는 상의 없이 그렇게 보도자료를 냈더라.
사실 7월 7일 오후에 일본 매니지먼트사에서 A씨의 은행 인출건으로 확인 전화가 왔고 심각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가족들이 다음날 일본에 들어올 것으로 요청했다. 7일 행각이 들통 났음을 인지한 이씨는 7일 밤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가족들은 다음날 일본으로 갔다. 8일에 나와 어머니가 일본에 가서 관계자들 이야기를 들으니 7월 18일 도쿄 국제포럼에서 헌화식이 크게 진행될 예정이며 가족들도 당연히 참석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 헌화식 당일에는 2만여 명의 팬들이 참석했다.
김씨와 박씨는 "A씨가 당연한 가족들의 권리를 철저히 차다시키는 이상한 행동들을 왜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며 "한편으로는 상당한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2010년 10월 22일 박용하 아버지 사망
-박: 아버지 장례식 중 입관식 때, 장례식장에 가족들이 없는 틈을 이용해 A씨가 문상을 왔다. 나중에 보니 용하의 친구 연예인 몇 명과 같이 왔더라. 아마 친구들은 연락처가 A씨 밖에 없어서 A씨에게 전화해 장례식장에 온 듯했다. 나중에 우리 친척이 A씨가 밖에서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족들은 너무 잘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가족과 늘 연락하며 잘 지내는 것처럼 말이다. 박용하 사망한 직후부터 그러한 범행을 한 사람이 버젓이 아버지 장례식장에 나타나 이런 행동들을 할 수 있는지 또 한 번 이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박씨는 "이 얘기를 평생 안 밝히면 용하한테 미안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더 많이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만 밝힌 것"이라며 "이 정도라도 안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우리는 A씨의 인출시도도 무위로 끝나고 용하 물건도 찾았기에 법적 대응은 안 하려고 했다. 죽은 용하의 이름이 또 다시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아시는 분들, 일본 분들도 우리가 법적으로 대응 안하고 끙끙거리고 있으니까 왜 가만히 있냐고 하더라. 그래서 2011년 11월에 검찰청에 진정서를 넣었다. 검찰에서 1년 넘게 조사를 하고 2013년 2월에 A씨를 기소했다. 시작할 때 쉬운 싸움은 아닐 거라고 각오했지만 이게 근 2년 반에 걸쳐 진행됐다.
"용하와 형,동생하던 E씨는 왜 A씨를 채용했나"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이하 '연매협')는 상벌조정윤리위원회(이하 '상벌위'를 열고 A씨에 대해 지난 1월 채용금지 결정의 의결했다. 이는 사실상의 연예계 퇴출 조치로, 재판이 진행 중인 사항에 대해 연매협이 채용금지결정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상벌위는 "A씨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사회적으로 본 업계 종사자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라며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자숙하고 있어야 할 시점에도 국내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매니저로 버젓이 일을 하며 일본에서 버젓이 활동을 했다"고 적시했다. 상벌위는 "A씨가 징역형 후에도 일본 등지에서 연예매니저로 활동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라며 "부적격 연예매니저 A씨에 대한 정보를 일본 엔터테인먼트 관계사들에게 전달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유관 단체에도 이를 알려 업계의 건실화를 도모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재판은 끝났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다. 2011년 7월께 A씨와 B씨가 모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했다. 유명 작곡가 E씨가 공동대표로 있는 회사다. E씨하고 용하는 생전에 작곡가와 가수로 가까운 사이였다. 사망 직전까지도 형, 동생사이로 지냈다. 용하가 사망하고 2010년 9월에 E씨를 만나 A씨 얘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 법적으로 처리하라고,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A씨와 B씨를 채용했다. E씨를 찾아가 어떻게 A씨를 채용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쓸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이후 E씨를 몇 차례 만나 A씨의 채용에 관해 물었다. 그때마다 정확한 답변을 피하고 말을 돌렸고 만약 유죄 판결이 나오면 누구보다 A씨를 처리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E씨가 A씨를 채용한 상황이고 재판에서 유죄가 나오면 단죄를 하고 어머니를 찾아뵙겠다고 한 것이 지난해 5~6월께다. 그리고 8~9개월이 흘렀는데 연락도 없다.
"살날 많은 A씨, 반성하고 살았으면"
고인의 누나 박씨는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신기하게도 A씨가 하늘 일마다 들통이 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용하의 영혼 말이다"라고 했다. 김씨는 "용하가 간지 3년 반 정도 됐는데 이제 가족들도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 당시에는 하루, 하루 지내는 게 고통이었다.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었다"고 했다.
-박: A씨가 지난해 11월 법정에서 '박용하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회사라며 그 권리로 (유족)가족을 지키려 했는데 잘못 왜곡돼서 이 자리에 섰다고 한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 A씨가 지난해 11월 법정에서 '박용하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회사라며 그 권리로 (유족)가족을 지키려 한 것이 이런 결과가 됐다'고 한 적이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성과 사과가 먼저 아닌가. 그런데 A씨는 단 한 번의 사과의 메시지도 없었다.
-박: 한 일본 팬이 한말이 기억난다. 자기는 A씨하고 친했고 동생처럼 생각했는데 자기가 아는 A씨가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사람인데 반성을 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 분이 울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A씨에 대한 용서?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그 사람이 일본 팬 말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고 배우 박용하 |
문완식 기자 munwansik@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