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목 /사진=임성균 기자 |
30년 가까운 탄탄한 연기 내공을 갖춘 유승목. 그는 여러 출연작에서 강렬하고 때론 능청스런 모습으로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승목에게 인터뷰 전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을 5편 꼽아달라고 했다. 연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과 캐릭터, 인연을 맺은 감독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살인의 추억'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유승목 |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 지방 기자
봉준호 감독의 대표 흥행작 '살인의 추억'은 다년간 연극 배우로 내공을 쌓은 유승목을 영화계에 입문하게 해준 작품이다. 단역이라 존재감은 미비하지만 그만큼 그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극 중 그는 지방 기자로 등장한다. 정장 차림에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수수한 모습이 사뭇 지금과 다른 분위기다. 당시 '살인의 추억' 각본을 썼던 심성보 감독이 사진 기자로 그와 깜짝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심 감독과는 '해무'로 다시 인연을 맺었다.
"그땐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했던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님이 누군지도 잘 몰랐어요. 회차가 별로 안 됐는데 생계를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죠. 참, 봉 감독님과 미팅을 했을 때 '저랑 생일이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알았는데 생년월일이 다 똑같더라고요. 하하. 참 훌륭한 감독과 연이 닿아서 시작을 잘했던 작품이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조은숙을 짝사랑하는 유 선생을 연기한 유승목 |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감독 이하) 유 선생
유승목은 2006년 개봉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심천대학 교수인 유 선생 역을 맡아 비중 있는 연기를 펼쳤다. 그가 연기한 유 선생은 극 중 조은숙 역의 문소리를 짝사랑하는 순정적인 남자다. 하지만 촌스러운 패션 감각과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가진 유 선생의 모습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유승목의 또 다른 연기 변신을 볼 수 있는 영화. 유승목은 "연출을 한 이하 감독과 같은 단국대 출신이라서 각별한 사이"라며 "어느 때보다 감독과의 호흡이 잘 맞았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하 감독이 학교 다닐 당시 함께하자고 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때는 학업 때문에 못한다고 거절했었죠. 그리고 나중에 또 출연 제의를 했는데 두 번 거절할 수는 없어 수락했죠. 그게 '1호선'이란 영화였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 다음 상업 영화로 찍은 것이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었어요. 대본을 봤는데, 굉장히 비중이 컸죠. 입봉하는 감독으로서 그런 역할을 시키기가 쉽지 않았는데, 저에게 주더라고요. 흥행은 잘 안 됐지만 저한테는 정말 고맙고 감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시대를 좀 앞선 영화가 아닌가. 하하."
'고령화 가족'에서 오한모를 괴롭히는 건달 약장수로 열연한 유승목 |
◆'고령화 가족'(감독 송해성) 건달 약장수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 가족'. 윤여정, 윤제문, 박해일, 공효진 등 화려한 출연진 사이에 유승목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가 맡은 역할은 건달 두목인 일명 '약장수'.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에 이마를 찡그리며 바라보는 얼굴이 인상적이다. 건달 출신의 오한모 역을 연기한 윤제문에게 불법 오락실 바지 사장으로 들어오라는 재촉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조연 배우들의 역할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님과 배우들이 함께 엠티를 갔었어요. 감독님이 술자리에서 저에게 '약장수'란 역할을 주시더라고요. 처음엔 잘 할 자신이 없어 거절했죠. 대사가 딱딱하게 문어체라 쉽지 않은 역할 같았어요. 연기는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님이 시사회 때 송강호 선배님이 오셔서 제 칭찬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이 영화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죠."
'해무' 속 거친 성격의 어선 롤러수 경구로 분한 유승목 |
◆'해무'(감독 심성보) 어선 롤러수 경구
뱃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해무'는 배우로서 유승목의 입지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준 작품이다. 그는 극 중 욕망에 충실한 롤러수 경구 역을 맡아 존재감을 뽐냈다. 곱슬머리에 청색 점퍼를 입고 실제 뱃사람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로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김윤석 박유천 김상호 문성근 이희준 등 어선 전진호의 선원들과의 연기 앙상블도 인상적. '살인의 추억'으로 인연을 맺은 봉준호 감독이 제작을, 심성보 감독이 연출을 맡으면서 전진호에 탑승하게 됐다. 유승목은 "출연만 시켜준다면 마다할 작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좀 더 분량이 적은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경구라는 역할이 비어있으니, 한 번 해보라고 제안하시더라고요. 대본을 읽어 보고 바로 하겠다고 했죠. 경구를 잘할 수 있는 이유를 문자로 쫙 정리해서 얘기했던 같아요. 제가 직접 하고 싶다고 얘기하긴 처음이었죠. 소속사에서도 많이 도와줬어요."
'강남1970'에서 조직폭력배의 뒷배 서태곤 전 국회의원으로 열연한 유승목 |
◆'강남1970'(감독 유하) 전 국회의원 서태곤
'강남1970'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종대(이민호)도, 용기(김래원)도 아니다. 바로 부동산의 큰 손 서태곤 전 국회의원이다. 극 중 서 의원은 조직 폭력배의 뒷배가 되는 비리 정치인. 유승목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회에 다시 입성하려는 서 전 의원 역을 맡아 잔인하고 비열한 악인을 연기했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이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갑고 악랄한 모습을 대변한다. 유승목은 극 중 인물들과 기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강남1970'을 하면서 부산 사투리도 배워야 했고, 몸무게도 5~6kg 정도 불려야 했어요. 정말 힘들었죠. 가뜩이나 작품에 대한 고민 때문에 식욕이 떨어지는 데 아침, 저녁으로 삼겹살과 짜장면을 먹으면서 살을 찌웠죠. 조끼 단추가 안 채워질 정도로 몸이 불었어요. 하하. 정말 고민 많이 하면서 했던 작품인데, 결과물이 나왔을 때 정말 좋았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