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지터. /AFPBBNews=뉴스1 |
마이애미 말린스는 지난 8년 연속으로 승률 5할 미만에 그쳤고 14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했으며 지난 13년 중 12년 동안 관중동원에서 내셔널리그 꼴찌를 차지한 팀이다. 그 기간 동안 팀이 단시일 내에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거의 없었기에 팀 전체에 항상 무거운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너무도 오래 지속돼 왔기에 팬들도 이런 분위기에 거의 만성이 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지난 2월 구단주 제프리 로리아가 구단 매각 의사를 발표했을 때 마이애미 팬들은 이젠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로리아가 구단의 성적이나 팬들의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최대한의 이익을 남기는 일(이 경우는 손실을 가능한 줄이는 일)에만 혈안이 됐던 역사상 최악의 구단주라는 말을 들었기에 충분히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더구나 전 뉴욕 양키스 캡틴이자 미래 명예의 전당 멤버인 전 슈퍼스타 데릭 지터가 이끄는 투자그룹이 새로운 구단주로 오게 되면서 마침내 암울하기만 하던 구단의 분위기가 새롭게 쇄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지난 9월 총액 12억달러에 데릭 지터가 이끄는 투자그룹에 구단 매각이 확정된 뒤 경영권을 넘겨받은 새 구단주 그룹의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새 경영진도 예전 구단주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투자 이야기는 전혀 없고 구단의 부채 상황과 비용감축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마이애미처럼 중병에 걸려 있는 구단을 소생시키려면 상당한 투자와 시간, 노력이 필요하기에 아무리 새로운 구단주라도 당장 뭔가를 만들어내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팬들에게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며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달콤한 열매를 얻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새 구단주로서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인수인계 과정에선 그런 메시지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시작부터 뭔가 “이것 아닌데”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말과 행보들을 이어가며 그동안 구단주 복이 전혀 없었던 마이애미 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전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주 제프리 로리아. /AFPBBNews=뉴스1 |
구단 지분이 단 4%에 불과한 소수계 구단주임에도 높은 명성을 등에 업고 새로운 구단 CEO로 임명된 지터는 처음부터 미래와 희망의 메시지는 생략하고 구단 재건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며 대규모 페이롤 감축과 대대적인 프론트오피스 숙청작업을 예고하는 것으로 CEO로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미스터 말린’이라고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제프 코나인과 명예의 전당 멤버인 안드레 도슨과 토니 페레스, 그리고 팀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감독인 잭 맥키언 등 4명의 팀 중역들을 해고하는 것으로 구단 경영권 인수인계 작업을 시작했는데 직접 자신이 이들을 해고하는 대신 구단 사장인 데이빗 샘슨에게 이들의 해고작업을 신속히 마무리하라고 지시한 뒤 이 작업이 마무리되자 샘슨마저 쫓아냈다. 전임 사장인 샘슨에게 이들을 해고시킨 것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뜻도 있었지만 이들은 전 구단주 로리아가 임명한 사장이 해고하게 함으로써 잔여연봉 등으로 500만달러 정도 책임을 전 구단주 로리아에게 떠넘기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새 구단주로서 첫 행보가 팀의 간판급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쳐 낸 것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뒤늦게 이들 4명을 만나 다시 구단에 복귀하라고 제안했으나 그전까지 연봉 10만달러 이상을 받던 이들에게 새 연봉으로 2만5천달러라는 형식적이고 모욕적인 오퍼를 했고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구단을 떠나가며 강한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사실 새로운 구단주가 구단 프론트 오피스를 물갈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과정에서 예전 수뇌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의 모양새는 갖추는 것이 기본인데 지터의 경우는 마치 점령군처럼 행동하며 거의 냉혈한으로 비춰지는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과 고집이 없다면 하기 힘든 행동으로 한 마디로 “내가 데릭 지터다”라는 함성이 울려 퍼지는 느낌이다. 양키스에서 20년을 뛰며 14번이나 올스타로 뽑혔고 모든 팬들에게 ‘캡틴’으로 불리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였기에 이런 변화는 충격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터의 이런 엄청난 고자세는 팀의 간판스타이자 최고연봉 선수인 슬러거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트레이드 협상 과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3년전 13년간 3억2천500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계약을 체결한 스탠튼은 아직도 10년간 2억9,500만달러의 계약이 남아있어 마이애미의 팀 재건을 위해선 반드시 트레이드해야 하는 선수가 됐다. 하지만 그는 계약 조항에서 풀 트레이드 거부권을 갖고 있어 그 어떤 트레이드로 그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스탠튼을 트레이드하려는 과정에서 지터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한마디로 ‘고압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시즌 종료 후 한동안 스탠튼과 만남은 커녕 전화 통화조자 한 번 하지 않고 있다가 메이저리그 단장회의 때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스탠튼의 트레이드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그때까지 당사자인 스탠튼에겐 말 한 마디 없다가 언론 플레이부터 시작한 것이다.
지안카를로 스탠튼./AFPBBNews=뉴스1 |
이어 그는 스탠튼에게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나섰다고 한다. 마이애미 헤럴드에 따르면 지터는 스탠튼에게 “구단의 트레이드를 받아들여라. 만약 거부한다면 팀의 다른 주요선수들을 모조리 다 내보내 너는 뼈만 남은 팀에서 유일한 스타로 뛰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통보가 아니라 협박으로 들린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메이저리그 홈런왕이자 NL MVP에 오른 선수라도 협박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스탠튼의 트레이드가 구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비상식적인 방법까지 쓰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팬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만에 하나 실제로 스탠튼의 트레이드가 불발된다면 ‘스탠튼과 꼬마들’이라는 팀을 내보내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말인데 그걸 팬들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궁금하다.
이미 알려진 대로 스탠튼은 자신의 고향팀인 다저스로 트레이드되길 원하고 있으며 최소한 다저스가 그의 영입을 완전히 포기하기까지는 다른 팀으로의 트레이드 승인을 보류시킬 생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저스는 10년간 3억달러에 육박하는 엄청난 잔여계약을 떠안기를 꺼려하고 있는 반면 다저스의 라이벌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2루수 조 패닉과 팀내 톱2 유망주인 투수 타일러 비드와 외야수 크리스 쇼를 제시하고 상당수의 잔여계약도 맡을 수 있다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스탠튼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마이애미 구단은 샌프란시스코가 스탠튼의 잔여계약 중 2억5,000만달러 이상을 책임진다면 거래에 응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흘러 보내고 있다. 다저스는 스탠튼의 대가로 샌프란시스코보다 훨씬 좋은 유망주들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샌프란시스코만큼 엄청난 금액을 떠맡을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터는 유망주보다는 돈에 더 비중을 두는 분위기여서 결국은 스탠튼이 다저스행 소원을 이루기는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우승 가능성이 있는 팀에서 뛰고 싶다고 했던 스탠튼 입장에선 마이애미에 계속 남는 것 보다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이 그나마 낫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