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쓰백'의 한지민 /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 |
2018년의 한지민(36)을 지켜보며 진심은 결국 응답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한지민이 주연을 맡은 영화 '미쓰백'(감독 이지원)은 주류 영화계가 눈여겨보지 않은 기획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고 한껏 날을 세운 채 살아가는 거친 여자가 학대받는 소녀를 알아보고 결국 함께하게 된다는 작은 영화를 반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충무로에선 비주류인 여성 주인공에다, 검증되지 않은 신예 감독에다, 아동학대라는 소재가 더해지니 더더욱 그랬다. 고운 얼굴과 햇살 같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천사표' 한지민은 황폐한 여자 백상아와는 극과 극이나 다름없었다. 투자도 배급도 개봉도 쉽지 않았다. '미쓰백'은 지난해 봄 촬영을 끝낸 뒤 1년반 가까이가 지나고서야 관객과 만났다.
그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아동학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힘있는 만듦새, 배우의 열연이 더해진 '미쓰백'은 '쓰백러'로 불린 열혈 관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N차관람 열풍을 일으켰고, 72만 관객을 넘겨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미쓰백' 백상아 자체였던 한지민은 2018년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2003년 데뷔 이후 처음 받아든 여우주연상 트로피였다. 영평상에서, 청룡영화상에서,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그녀는 상을 받을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것이 더 먹먹했던 건 '미쓰백'이 지금에 오기까지 주인공으로서 그녀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져서다.
하지만 분명하다. '미쓰백'은 한지민이었기에 가능했다. 변화와 도전을 거듭해 온 성실한 배우가 진정 공감하고 온 힘을 다해 연기한 결과다. 착해빠져선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회자되는 연예가다. 꾸준한 진심으로 결국 관객과 평단의 인정을 받은 그녀를 지켜보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한지민은 "그저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고 했지만, 한창 흥행 중인 '국가부도의 날'에서 막바지 등장한 그녀가 희망의 아이콘이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 '미쓰백'의 한지민 /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 |
-올해 '미쓰백'이 많은 응원과 지지 속에 손익분기점을 넘겨 흥행했고, 한지민에게도 배우로서 첫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 됐다.
▶영화 덕분인 것 같다. 여성영화의 의미를 두고 선택한 건 아니었는데 상대적으로 그런 작품이 없다보니 응원과 지지를 받게 됐다. 뿐만 아니라 영화가 담은 사회적 메시지가 있다보니 응원하시는 것 같다. 상을 받을 때도 영화의 의미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쓰백'이 다른 시기 개봉했다면 달리 다가갈 수도 있었을 테니. 개봉이 늦어져서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인 것 같다.
-수상 소감들을 눈여겨 봤다. 영화가 힘들게 만들어지고 개봉이 늦어지는 동안 책임감과 부담을 많이 느꼈구나 새삼 느껴졌다.
▶주연 배우로서 끌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현장에서 보통은 유쾌하게 하는 편인데 잘 그러지 못했다. 후반부에 가서야 촬영을 3회차 남기고 회식을 하고 그랬으니까. '미쓰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에 제가 들어가서 투자가 어렵나, 다른 배우가 들어왔으면 원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시상식에서 눈물을 쏟았던 모습이 계속 생각난다. 특히 영평상 시상식에서는 '미쓰백'에서 함께 한 권소현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받을 때부터 펑펑 울더라.
▶그 친구가 2주간 십몇 킬로를 빼면서 이 작품을 했고 그간 어려움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 친구가 상을 받는다는 게 너무 기뻤다. 그 상태에서 단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추슬러지지가 않더라. 그때 모든 영상을 없애버리고 싶다.(웃음)
그러고는 막상 집에 오니 가만히 있다가 막 눈물이 났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운이 있고 때가 있을 거야' 주입은 했지만 스스로 모른 척 했던 압박감이 컸구나 했다. 제가 상을 받았지만 이 영화에게도 역사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쁨보다는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배우생활 첫 여우주연상을 한꺼번에 여럿 받았다.
▶돌이켜보면 다 꿈 같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생활이 달라지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까 더 꿈 같은 것 같다. 이 영화의 의미를 더 깊이 부여해주신 덕에 상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촬영 때 감독님이 '여우주연상 받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상 받으려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을 안 했는데, 영평상을 받게 됐다는 걸 처음 기사로 본 날 (권)소현이에게 참 이런 별일이 있다며 전화로 얘기했었다.
-'미쓰백'은 한지민의 변신으로도 화제였다. 그간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연기를 해 왔는데 되려 서운하지는 않았나. 천사표란 이미지에 그 간의 노력이 가려진 면도 있다.
▶서운하지 않다. 이 순간에 '미쓰백'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쌓인 경험·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말씀해주시는 수식어들 또한 '불편해요 싫어요'가 아닐 수 있다. 그저 그만큼 임팩트가 적었거나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한다. 어떻게 하면 연기로서 더 보여드릴 수 있을까, 이건 저만의 숙제라 생각한다. 그저 연기하는 방법밖에 없다 생각했다.
영화 '미쓰백'의 한지민 /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 |
-수상 소감에서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연기하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이미 올해 '그것만이 내 세상', '허스토리', '국가부도의 날'까지 여러 작품에서 한지민을 만났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바뀌는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에서는 좀 더 다양하게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유가 있는 작품에 작게나마 함께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 경우는 처음 맡은 부잣집 역할이다. '늑대'가 3회 만에 종영을 한 뒤로 예쁘게 꾸미는 캐릭터가 없었다. 무엇보다 '밀정'에서 딱 한 신 마주쳤던 이병헌이라는 배우랑 마주보고 연기를 해 보고 싶었다.
-특별출연에 피아노까지 연습해 치지 않았나.
▶피아노 연습은 제가 속았다.(웃음) 요즘 CG가 좋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박정민 군이 8곡을 연습하고 있다는 거다. 제가 2곡을 하면서 CG로 처리해 달라기엔 차마…. 동시녹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착하며 연습했나 모르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 친구(박정민) 덕에 자극이 됐나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허스토리'에도 등장한다.
▶드라마 '경성스캔들'을 했을 때 팬분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부를 하고 계셨더라. 저도 동참했는데 '허스토리'가 만들어질 즈음에 '기억의 터' 홍보대사를 맡았다. 마침 아는 동생이 캐스팅돼 같이 민규동 감독님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그럼 특별출연?' 이러시는 거다. 도움이 될만한 게 있다면 하겠다 했다. '할머니 예뻐요'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제 애드리브인데 써주셨더라.
-'국가부도의 날'의 마무리를 빼놓을 수 없다.
▶김혜수 신배님과는 2015년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만났다. 단체사진 때도 어깨동무를 해 주시며 사진을 찍고 해서 '내가 계를 탔구나' 했다. 스타시고 스크린 속 배우시지만 사람으로 만나면 인간 김혜수가 너무 멋있는 거다. 인연이 된 것도 신기하다. '미쓰백' 뒷풀이까지 오셨을 만큼 아낌없이 응원과 애정을 주시는 분이라 저도 보답하고 싶었다. 제작사 통해서 시나리오를 받아 읽어봤는데 쉽지는 않았다. 제게는 '한시현(김혜수 분)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은 듯한' 이라는 문구가 부담으로 다가오더라. 그래도 하고 싶었다.
영화 '미쓰백'의 한지민 /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 |
-다음 행보가 더 고민될 것 같다. 이미 차기작 JTBC '눈이 부시게'를 촬영 중인데.
▶'미쓰백' 개봉 전, '아는 와이프' 첫 방송 전 결정한 작품이다. 너무 행복한 현장이다. 미리 정해놨다는 것이 너무 좋다. 상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때문에 주저하고 싶지 않다. 다음 작품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감사하다. 덕분에 한 템포를 지나 그 다음에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2018년은 한지민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저에겐 쉴 틈 없이 바빴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사실 저는 목표도 미래 계획도 잘 세우지 않는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늘 바람이다. 새해가 리프레시 하는 기분이 있긴 하지만, 어제가 지나 오늘이 있듯 새해를 맞이하곤 한다. 지금 많은 분들이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씀해주시는데, 저는 '들뜨는 걸 겁내나?' 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보내고 있다. 나중에 저 순간에 난 왜 저걸 못 즐겼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돌아보면 그렇게 기억되지 않을까. 가장 찬란했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