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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산세는 산이 웅장하므로 사람이 나면 정직하고, 전라도 산세는 산이 촉하기로 사람이 나면 재주가 있고, 충청도 산세는 산이 순수하기로 사람이 나면 인정이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비록 판소리의 한 대목이지만 지역의 산세를 가지고 삼남 사람들의 인성을 품평한 것이 사뭇 재미있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자면 죽령 고개를 넘거나 문경새재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상도는 지리적으로 서쪽은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가 뻗어 내렸고, 동쪽으로는 태백산 줄기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이 힘차게 내려 뻗어 산들이 웅장하고 높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것이다.
반면 전라도의 산들은 높고 뾰족해 사람들이 나면 재주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라도를 예향이요, 소리의 고장이라 한다. 시골구석 어느 다방을 가보아도 하다못해 빛바랜 그림일망정 걸려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마을을 가도 농악대는 기본이다.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소리를 요청하면 멋들어지게 한가락 뽑는 곳도 전라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리꾼이나 전통 예술인들은 거의가 전라도 출신이라 보면 틀리지 않는다. 정말 이것이 다 산세가 촉해서 그런 것인가?
충청도의 산세는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낮지도 않다. 이런 산을 닮아 마음도 착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든 지역적 차이와 특성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역정서일 수 있고, 지역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망국병으로 불리는 오늘날의 지역감정하고는 차원부터가 다르다.
현실은 어떤가? 지금은 지역 차이는 없고 지역감정만 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어느새 망국의 병으로까지 치 다른지 오래다. 그 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차라리 경상도, 전라도라는 이름을 아예 바꾸어 지역감정을 치유하자고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역감정만 해소된다면야 무언들 못할까?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이제는 지역차별에 세대 간 차별과 진보, 좌우 이념이 더해져 더 복잡한 양상이다. 이를 풀기 위한 지혜가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다.
옛사람들이 팔도를 나눌 때 산이나 물을 기준으로 해 그 경계를 나누었지 사람의 성격을 보고 가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어찌 그리 풍토에 따라 기질이 다른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질이 옛날에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오늘날처럼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하고 다양한 교육이 시행되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다고만 볼 수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 선조들이 평한 것일 뿐, 오늘날의 관점은 아니다.
그럼 옛 사람들은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경상, 전라, 충청 삼남 사람들의 기질을 어떻게 평했는지 알아보자.
경상도는 말로해도 될 것을 꼭 송사를 하고 인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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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성호 이익은 "경상도는 서울보다 더 많은 명현을 배출했다."고 했다. 고려의 문성 안향, 포은 정몽주를 비롯해 조선조의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 서애 유성룡 등과 같은 명현은 모두 영남 출신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호 선생은 ?성호사설?에서 전라도보다 경상도에서 인재가 많이 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산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달려와 지리산에 이르러 전라, 경상 양도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은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을 이루었는데, 동쪽은 동해 쪽으로 연달아 뻗은 산이 바다를 막아 준다. 도의 서쪽은 지리산의 지맥이 또한 동쪽으로 달려오면서 모든 물길을 하나로 합쳐 김해와 동래 사이로 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처럼 경상도는 물길이 모아지면서 풍기風氣가 흐트러지지 않고 하나로 굳게 뭉쳤기 때문에 명현들을 배출하여 인재의 부고가 되었다. 그리고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와 안동과 예천 사이에는 곳곳에 명당이 열려 있어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곳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다."
경상도는 물길이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하여 동래와 김해 사이로 주변의 물길을 모아 수 백리를 흘러내리며 풍기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쳐 명당이 많아 인재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산과 물을 보고 기가 흩어졌는지 모였는지를 판단한다. 경상도의 산세는 전라도와 달리 겹겹으로 돌아 옹호하고 있다. 또한 사방의 크고 작은 하천들이 낙동강으로 일제히 모여들어 한 점의 물도 새어나가는 것이 없다.
실제 강원도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내려오면서 지류를 한데 모아 남해로 흘러 보낸다. 이처럼 낙동강의 물길은 기를 한데 모으면서 흘러내리고, 경상도의 산수 형세 또한 짜임새를 이루었기 때문에 명현의 출현이 서울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한편 성호는 경상도에 대해 매우 혹평하였다. 한마디로 경상도 사람들은 말로 해결될 것도 반드시 관가에 고발하고 인심 또한 고약하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성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경상도는 농부는 적고, 선비가 많아 경제가 나아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 인색해서 송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보다 놀고먹는 양반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다툴 뿐만 아니라 서로 말로 해도 될 것을 꼭 관청에 고발을 해 송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또 벼슬아치들은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매우 치사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경상도는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양반을 자처하며 놀고먹는 자가 많아 인심이 사납고, 욕심이 많다는 것이다.
헌종 때 실학자 이규경(1788?1863)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경상도 사람들을 사자단구로 섬색나려(讖嗇癩?)라고 했다. 섬색은 구두쇠 노랭이, 나려는 문둥병으로, 인색하고 인정머리 없는 노랭이와 문둥이 같다는 것이다. 혹평도 그만한 혹평이 없다. 반면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 인심조에서 경상도 사람들은 평안도 사람 다음으로 인심이 순박하고 후하다고 했다. 정조 때 문신 대사간 · 도승지 · 이조판서 · 대제학 등을 역임한 규장각 학사 석재 윤행임(1762~1801)도 8도의 인물을 평하면서 경상도 사람을 태산교악(泰山喬嶽), 즉 눈 속의 고독한 소나무〔雪中孤松〕이라 하였다. 태산과 교악은 모두 높은 산을 의미한다. 경상도는 남쪽 바닷가를 빼놓고 전부 산으로 둘러싸였다. 때문에 산의 심성을 닮아 경상도 사람들은 곧고 굳은 의지를 가졌다고 본 것이다.
전라도는 선비가 살만한 곳이 못되고 방술을 좋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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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호남은 선비가 살만한 곳이 못되는 곳일까?
어떻게 이런 말이 생긴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의 대실학자 성호 이익의 말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호남은 재주와 덕망이 있는 사람이 드무니 사대부가 거처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라도 풍속이 "노래와 여색, 부와 사치를 숭상하고 사람들이 영리하지만 기교를 다하여 문학을 중요시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한 자는 경상도에 비해 떨어지나, 전라도에도 인재가 적지 아니하다"고 했다.
무슨 연유로 성호는 전라도에 대해 인재가 드물다고 악담을 했을까? 과연 이익의 말처럼 전라도는 재덕이 있는 사람의 출현이 드물고, 사대부가 거처할 만한 땅이 아니란 말인가? 이익은 그 이유를 전라도 지역의 산천의 생김새, 즉 풍수지리에서 찾고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땅을 비교해 보면, 전라도는 사방으로 물길이 흩어지는 반면, 경상도는 낙동강 하나로 물길〔水系〕이 모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호는 전라도의 물길에 대해, 비가 쏟아지면 동쪽의 물은 모두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은 모두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전주 서쪽의 물은 모두 서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덕유산 이북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거슬러 흘러 금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전라도의 물길은 마치 여자의 머리를 풀어 헤쳐 놓은 것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산발사하형(散髮四下形)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물길은 짜임새가 없이 제 멋대로 흩어져 기가 모이지 않아 재주와 덕망 있는 자가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풍속이 거칠고 사대부가 거처로 삼을 곳이 못 된다 하였다. 다시 말해 전라도는 모든 강물이 방사선처럼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기가 모이지 않고 흩어져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느 정도 나쁜 것일까? 이익은 그 좋지 않은 정도가 고려 왕건의 '훈요 10조'에서 지적하고 있는 차령 이북의 산수가 배반하고 거스른 것보다 훨씬 심하다고 했다. 사실 전라도가 지역적 편견과 차별을 받은 연원을 따지면 왕건의 '훈요 10조' 중 8조 때문이다. 왕건은 재위 26년(943) 4월 임종 전 대광이라는 최고 관직의 군국대사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 10조를 주었다.
문제가 된 8조는 충남 차령산맥〔車峴〕이남의 금강 밖은 산형지세가 '병추배역'으로, '산세와 지형이 배역하는 땅'이라는 것이다. 왜 태조 왕건은 차령, 금강 이남을 배역의 땅으로 보았을까. ?고려사?는 그 내용을 이렇게 기술했다.
"차현 이남의 금강 아래는 산의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의 형세이니 인심 또한 그럴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거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국정을 맞게 되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고, 또 백제를 병합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으므로 환란을 지어낼 염려가 있다. 또 그들이 궁궐이나 사찰의 노비에 속하거나 나루터, 역원의 천한 직책을 가진 자라도 혹 기회만 있으면 왕과 조정에 붙어 간사하고 교묘한 말로 정사를 어지럽힐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비록 양민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쓰지 말지어다."
호남에 대한 태조 왕건의 불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왕건이 삼국통일을 할 때 끝까지 저항하며 애먹이던 나라가 바로 후백제 견훤이다. 차령이남 사람들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때문에 왕건은 호남의 인심도 그럴 것이라고 여겨 심지어 관청의 노비까지도 쓰지 못하도록 했다.
또 왕건의 말처럼 호남은 배역의 땅일까? 아니다. 왕건이 말한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은 대체로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이다. 금강은 전라도 진안에서 발원하여 덕유산의 물을 합하고 영동, 옥천을 거쳐 대전에서 계룡산 물과 합쳐 공주, 부여를 지나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이는 마치 고려 왕도인 개경을 향해 활을 겨누는 모양이 된다. 풍수에서는 이런 지세를 '반궁수(反弓手)'라고 하여 최고의 길지로 여긴다. 등 뒤에서 활을 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곧 배역이요 배반이다. 하지만 개성이나 한양에서 보았을 때는 배반의 땅이 될지 모르지만, 반대로 금강 이남 쪽에서 보면 활을 당기는 모양이 되어 오히려 명당으로 길지가 된다.
풍수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일례로 김호년은 ?한국의 명당?에서 물길〔水勢〕이 영남과 호남의 형세와 비슷한 프랑스와 독일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프랑스 물길도 전라도처럼 여자의 머리를 풀어헤친 것과 같은 산발사하형이다. 프랑스는 메시프 센트랄이라는 고원지대를 국토의 중앙에 두고 강들이 전라도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다.
반면 독일은 영남의 낙동강과 같이 모든 물길이 라인강으로 모아지고 북쪽으로 흘러 네덜란드 남부에서 북해로 들어간다. 이처럼 프랑스는 물길이 삼면의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개방적이고, 낙천적이며 사교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획일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과 창조적 기질 때문에 프랑스에서 예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전라도의 물길도 프랑스처럼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산하산발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창의적이고, 사교적이며 예술적이라는 풍수지리적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성호 이익은 "전라도는 방술을 좋아하고 큰소리를 잘 치며 남 속이기를 잘한다고 하였다. 실학자 초정 박제가((1750~1815)도 한집 건너 지관이라며 방술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정조 때 문신 석재 윤행임(1762~1801)은 전라도 사람들을 풍전세류風前細柳, 즉 바람 앞의 버들가지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기며 시대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능수버들은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릴지언정 잘 부러지지 않는다. 전라도 사람을 실버들에 비유한 것은 악조건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불굴의 정신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전라도 사람들의 붙임성 있고 친절한 성격을 잘 표현하였다.
충청도 사람들은 이재에 밝고 줄을 잘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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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충청도 사람들은 계산은 돼 있으면서 좀체 속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속내를 알 수 없어 음흉하다고도 한다. 필자의 고향도 천안이라 어려서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충청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됐유', '괜찮아유' 두 가지가 있다. 필자도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지 무심코 이 말을 잘 쓴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속내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을 이야기 할 때 가장 잘 인용되는 말이 있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장터 노점에서 한 아주머니가 물건을 팔고 있었다.
손님 "이것 얼마예요?"
아주머니"알아서 주셔유."
손님"그럼 5천원만 드리죠."
아주머니 '됐유'
손님이 물건을 팔겠다는 말로 알고 덥석 물건을 잡으니.
아주머니 "됐유 그냥 집에 가서 소나 먹일래유." 하더란다.
물론 이는 우수개 소리이다. 하지만 좀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타도 사람들은 보통 '됐유'하면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충청도에서의 '됐유, '됐네', '괜찮아유'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크다. 이처럼 충청도 사람들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필자가 고향에서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더해보자. 식사할 무렵 동네 어른께서 찾아오셨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가 맞이하면서 "진지 드셨어유"하고 물으니, 비록 먹지 않았지만 체면상 먹었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며느리는 밥상을 내지 않았다가 시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충청도에서는 식사했냐고 물으면, 보통 '됐네'라고 한다. 안 먹었어도 체면상 먹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서너 번 물어야만 그제 서야 속내를 말한다.
이처럼 충청도는 직접 화법 대신 우회적 표현을 많이 쓴다.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은 도무지 충청도 사람들의 속을 알 수 없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여유 있는 화법이라 하겠다.
그런 충청도를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평했을까? 이중환은 ?택리지? 인심조에서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많다하여 전추세리(專趨勢利)라 했다. 즉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충청도 사람들은 이익과 권세만 노린다고 해 세리장학(勢利??)이라고 혹평했다. 다시 말해 권력에 줄을 잘보고 이익을 잘 챙긴다하여 염병이란 뜻으로 세리장학이라 한 것이다. 한마디로 눈치를 잘 보고 줄을 잘 선다는 말이다.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가 이익이 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충청도 사람들을 혹평한 실학자 이중환이나 이긍익은 몰락한 남인 계열이다. 물론 이들이 조선조 중·후반 권력을 장악해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 남인들을 축출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포함한 그 추종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충청도를 혹평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충청사람들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예가 대통령 선거이다. 역대 대선과 총선에서 보여 주듯, 쉽게 충청도 표의 향방을 점칠 수 없다고 한다. 쉽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도 특유의 기질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절대 미리 나서지 않는다.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먼저 나서야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1등은 못하고 항시 2등만 하고 끝난다. 아직까지 충청도 대통령이 나오지 못한 것도 이런 기질 때문은 아닐까?
쉬운 예로 지금은 직고 했지만 삼김(三金 :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경상도 김영삼과 전라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충청도 김종필 만 대통령이 못됐다. 한 예로 경상도 사람은 싸우다 질 것 같으면 같이 죽자고 덤빈다. 전라도는 도망가 다음 기회를 엿본다. 충청도는 싸워보지도 않고 힘센 쪽으로 붙는다.
이렇게 된 까닭은 삼국시대 충청 북부 한강 일대가 삼국의 쟁패지였던 역사적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강유역은 당시 강자의 땅으로 득세했던 순서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령해 지배했다. 또한 후백제가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고려 왕건에게 복속되었던 아픔이 있는 땅이다. 이처럼 충청지역은 강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다 보니 수탈과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정치적 모호성과 순응하는 성격으로 굳어졌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충청도 사람들에 대한 혹평과 달리 찬양하기도 했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말했듯이 충청도는 산세가 순수해 사람들이 인정이 있고 순하다고 했다. 또 삼봉 정도전은 충청도 사람들의 성격을 가리켜 청풍명월이라 했다. 글자그대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것이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처럼 고매하여 풍류를 즐길 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다. 사실 '청淸' 자 들어가는 고장치고 산과 물이 좋지 않은 곳이 없다.
충청도 사람들을 양반이라 부르는 것은 그 성품이 점잖고 청풍명월과 같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낮지 않은 산세와 충청도 사람들의 느긋하고 둥근달처럼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 거기에 느린 말처럼 여유로움과 점잖은 언행 등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
이상 풍수로 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삼남 지방의 인심과 기질의 평은 어디까지나 일부 옛사람의 생각이지, 오늘날처럼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 볼 때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지 않다.
-정종수 CST 부설 문화행정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 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 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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