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황성빈이 17일 두산전 8회초 3루를 파고든 뒤 미소를 짓고 있다. /잠실=김진경 대기자 |
4할 타자 황성빈(27·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김태형(57) 롯데 감독의 정의다. 경기 전 황성빈이 해줘야 할 역할에 대해 콕 집어 이야기했고 '마황(마성의 황성빈)'은 감독의 주문을 100% 이행해냈다.
황성빈은 17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2024 신한 SOL뱅크 KBO리그 방문경기에 1번 타자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3타수 2안타 2볼넷 1득점 맹활약을 펼쳤다.
2022년 롯데의 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한 황성빈은 폭발적인 스피드와 근성 넘치는 플레이로 주목을 받았고 올 시즌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다. 지난해 부침을 겪었던 그는 올 시즌 흠잡을 데 없는 톱타자로 거듭났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지난달 29일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황성빈은 지난 14일 복귀해 경기 중반 투입돼 도루 하나와 득점을 해냈고 16일 KT 위즈전에서 선발로 복귀해 3타수 2안타 1볼넷 1득점으로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도 2안타를 날려 시즌 타율은 무려 0.409(44타수 18안타)까지 치솟았다.
김태형 롯데 감독이 8회초 팀의 득점에 박수로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통산 홈런이 하나였던 황성빈은 지난달 한 경기에서 두 개의 아치를 빼앗아낸 KT 에이스 윌리엄 쿠에바스를 다시 만나 맹활약을 펼쳤다. 첫 타석부터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도 침착히 볼을 골라내 볼넷으로 출루했고 쿠에바스의 신경을 긁었다. 황성빈을 지나치게 의식한 쿠에바스의 견제구가 뒤로 빠진 사이 황성빈은 2루로 향했고 쿠에바스가 폭투까지 범해 3루에 도달했다. 빅터 레이예스의 짧은 중견수 뜬공 때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홈까지 내달려 득점을 만들어냈다. 절묘한 기습번트도 성공시켰고 8회엔 내야 안타까지 만들어냈다. 수비에서도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9회말 강백호의 파울 플라이를 완벽히 걷어냈다.
올 시즌 황성빈은 14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실패는 단 하나도 없다. 안타 18개 중 내야안타가 5개에 달한다. 50타석 이상 나선 타자들 가운데 김성윤(삼성·35.7%) 다음으로 내야안타 비중(27.8%)이 높다. 5차례 시도한 번트로는 4차례 주자를 진루시켰고 한 차례는 안타로 만들어냈다. 도루나 안타 등 정확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공헌도 적지 않다. 이 같은 플레이로 팀 분위기를 활력을 보태고 직접적인 득점과 승리를 이끄는 황성빈의 재능에 사령탑은 주목한 것이다.
두산에서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며 '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태형 감독은 경기의 흐름을 단번에 뒤바꿔놓을 수 있는 영리한 선수들의 위력을 많은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새로 부임한 롯데에서 이러한 활약을 펼치는 황성빈이 기특할 수밖에 없다.
황성빈(오른쪽)이 8회초 1루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내야안타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
황성빈이 8회초 윤동희의 보내기 번트 때 2루를 거쳐 3루까지 파고들고 있다. /영상=티빙(TVING) 제공 |
윤동희의 보내기 번트 때 2루로 향한 황성빈(왼쪽)이 3루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
결국 3루까지 도달하는 황성빈.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
물론 이 말 속엔 황성빈의 타격 사이클이 언젠가는 꺾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황성빈은 타선에서도 맹타를 휘두르며 팀 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날도 황성빈이 팀에 승리를 안겨다줬다. 불안한 1점 차 리드를 지키던 8회초 황성빈의 발이 경기 흐름을 완전히 롯데 쪽으로 기울게 했다. 앞서 안타 하나 포함 3출루와 도루 하나(시즌 14호)까지 기록했던 황성빈은 선두 타자로 나서 평범한 유격수 방면 땅볼 타구 때 1루로 전력질주를 해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전매특허 1루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 또 나왔다.
이어 윤동희의 보내기 번트 때 쏜살같은 스피드로 2루를 파고들었다. 이때 슬라이딩을 했던 황성빈이 돌연 일어서더니 갑자기 3루를 향해 내달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지는 상황이었지만 황성빈이 옳았다. 번트 타구를 잡기 위해 포수와 투수, 3루수 이유찬까지 홈 플레이트 근처로 모였는데 이 상황에서 두산 포수 김기연이 2루로 공을 뿌렸고 2루에서 세이프가 된 황성빈은 3루가 비어있다는 걸 캐치해 한 베이스를 더 훔쳐낸 것이다. 쓰러져 있던 두산 유격수 전민재와 3루를 비워놓은 이유찬이 뒤늦게 서둘러 몸을 움직여봤지만 공도 던져보지 못한 채 황성빈에게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후 고승민의 우전 안타 때 황성빈이 손쉽게 홈을 파고들었고 흐름을 완전히 가져간 롯데는 나승엽의 2타점 적시타로 4-0까지 점수 차를 벌렸고 분위기를 완전히 내준 두산은 실책까지 범하며 한 점을 더 헌납했다.
8회초 롯데의 득점에 기뻐하는 신동빈 롯데 구단주.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
이날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3루 질주는 사실 철저한 훈련에 의한 것이었다. 경기 후 만난 황성빈은 "스프링캠프 때 (고)영민, (유)재신 코치님과 훈련했던 상황이었는데 오늘 나왔다. (윤)동희의 번트 때 타구가 떨어지는 곳과 3루수 위치를 봤는데 2루에선 무조건 살았다고 생각했고 3루 베이스가 빈 걸 보고 바로 일어나서 달렸다"고 말했다.
고영민 코치는 현역 시절 센스 넘치는 주루플레이로 각광을 받았다.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주루 플레이를 한다고 해 '변태 주루'라는 말까지 붙었다. 이를 황성빈이 완벽히 재현해낸 것이다.
그는 "영민 코치님과 연습했던 플레이였고 나도 짜릿했는데 영민 코치님께서 나보다 더 좋아하시더라"며 "아직 영민 코치님 현역 시절(주루 플레이)을 따라가기에는 멀었지만 더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태형 감독의 반응도 남달랐다. 황성빈은 "딱히 해주신 말씀은 없었다"면서도 "홈에 득점하면 감독님께서 하이파이브를 해주시는데 그때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 평소와는 달랐던 것 같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황성빈의 기막힌 플레이에 잠실구장 원정 응원석을 가득 메운 롯데 팬들도 열광했다. 이날 경기는 매진을 이뤘는데 8회 황성빈의 주루 플레이에 원정응원단에선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고 홈 응원단은 허망함에 침묵에 빠져들었다. KT전에 이어 이날도 황성빈의 응원가 떼창이 울려퍼졌고 그가 수비에 나설 때에도 그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황성빈은 "수비에 나가는데 팬분들께서 제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냥 수비에 나가는 것인데 불러주셔서 웃으면 안 되는데 기뻐서 웃음이 났다. 응원해주시는 팬분들께 저도 기쁨을 드리고 싶다"고 다짐했다.
승리 후 황성빈(왼쪽)이 김태형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