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원한 에이스" 밤 늦도록 팬들 챙긴 GOAT, 끝까지 '니느님' 그 자체였다 [잠실 현장]

잠실=안호근 기자 / 입력 : 2024.09.1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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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니퍼트(가운데)가 14일 은퇴식을 마친 뒤 자신을 기다린 팬들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6년 동안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두산 베어스에서만 7년을 보내고 떠난 더스틴 니퍼트(43)는 2018년 KT 위즈에서 활약한 뒤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니퍼트를 떠올릴 때 두산이 연상될 만큼 두산 팬들에겐 단순한 외국인 선수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선수였다.


니퍼트가 두산을 떠난지 7년 만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로는 6년 만에 다시 잠실벌을 찾았다. 팬들이 간절히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다.

니퍼트는 14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두산과 KT의 시즌 최종전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자신이 몸 담았던 두 팀의 경기에서 은퇴 후 6년 만에 드디어 공식적으로 야구공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니퍼트는 두산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가을야구에 나서던 두산은 2011년 5위로 주춤했는데 니퍼트라는 새 에이스를 찾아 위안을 얻은 한 해였다. 이후 두산은 빠르게 전력을 끌어올렸고 니퍼트를 선봉에 세워 2015년부터 왕조를 열었다.


214경기에서 102승 51패 1홀드 1082탈삼진 평균자책점(ERA) 3.59을 기록했는데 100승과 1000탈삼진을 기록한 외국인 투수는 니퍼트가 유일하다. 2015년 두산에 V4를 안긴 그는 이듬해 22승을 거두며 최우수선수(MVP)와 함께 두산 역사에 가장 완벽했던 우승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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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회에서 팬들에게 장미를 건네고 있는 니퍼트(오른쪽).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2022년 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이해 뽑은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외국인 투수로는 유일하게 선정됐을 정도로 실력만으로도 전설이지만 어떤 국내 선수들과 견줘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 워크에식과 팀 퍼스트 정신 등으로 외국인 선수 GOAT(Greatest Of All Time)로 불릴 수 있었다. 팬들은 그를 신격화했고 '니느님(니퍼트+하느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017시즌을 마친 뒤 두산은 니퍼트와 결별했고 이듬해 활약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팬들로선 생이별을 한 듯한 섭섭함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렇기에 최근 니퍼트의 은퇴식 소식에 두산 팬들이 설레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거의 매진에 가까울 정도로 좌석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팬 사인회에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택된 70명만이 니퍼트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경기를 앞두고 잠실구장을 찾은 니퍼트는 동료들과 인사할 틈도 없이 팬들을 만났다. 긴 대기줄 틈에선 니퍼트 유니폼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니퍼트와 간단한 인사, 사인을 받은 팬들은 니퍼트로부터 노란 꽃 한 송이씩을 챙겨 빠져나왔으나 대부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니퍼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로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1995년 베어스의 2번째 우승 때부터 팬이 됐다는 김민성(38)씨는 "6년 동안 기다렸다. 은퇴식을 못할 줄 알았는데 뒤늦게나마 열어준 두산 구단에 고마운 마음"이라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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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사인회에 참가한 두산과 니퍼트의 팬 김민성씨. /사진=안호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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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영씨가 니퍼트의 은퇴식 기념 현수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니퍼트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은 모두 챙겨보고 있다는 그는 "두산에서 은퇴를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면서도 "팬 사인회에 당첨되고 바로 앞에서 본 오늘이 제 머릿속에 평생 남을 것 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두산을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선수였다. 김씨는 "많은 외국인 선수들을 봤지만 니퍼트처럼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선수는 없었다"며 "팬의 입장에서도 너무 존경스럽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이 자리에서 응원을 하겠다"고 전했다.

20여년 간 두산의 팬이었다는 유소영(41)씨는 팬 사인회 이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니퍼트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니퍼트는 두산 팬들에게 너무도 특별한 선수다. 13년 동안 우승 문턱을 넘지 못했을 때 에이스로서 우승을 안겨준 고마움이 있다"며 "두산에서 은퇴를 했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돼 너무 좋다"고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유씨는 "너무 고생 많았고 앞으로 최강야구를 비롯한 새로운 활동을 할텐데 지금처럼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성공하시길 바란다"며 "니퍼트는 우리의 영원한 에이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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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퍼트가 은퇴식을 마친 뒤 차에 타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결국 경기 시작 1시간여를 남기고 모든 좌석이 팔렸다. 이날 경기는 특별히 홈과 원정 응원석의 개념이 중요치 않아 보였다. 니퍼트를 보기 위해 두산 팬들은 원정 응원석에 앉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니퍼트가 시구자로 등장하자 만원관중들은 하나 같이 기립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1회초 수비 후 현역 때와 마찬가지로 야수들을 한 명씩 맞아줄 때도, 클리닝타임 때 양 팀 선수들이 특별한 선물을 전달할 때도, 경기 후 공식 은퇴식 때도 관중들은 니퍼트의 모든 행동에 주목했고 뜨거운 호응을 보였다.

은퇴식에 나선 니퍼트는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만으로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만큼 한 마음 한 뜻으로 니퍼트의 마지막 길을 축복했다. 옛 동료들과 특별한 기념촬영을 하고 영상 메시지를 보냈고 이어 니퍼트도 편지를 낭독했다. 니퍼트는 수차례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많은 관중들이 덩달아 울었다.

편지 마지막엔 팬들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니퍼트는 "끝으로 팬 여러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가 사랑하는 야구를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KBO리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팬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언제나 놀랍습니다"라며 "경기 승패와 관계없이 언제나 꿋꿋하게 저를 응원해줬습니다. 저의 뒤에서 제가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매일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여러분은 제 마음 속에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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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낭독하고 팬들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니퍼트. /사진=김진경 대기자
이어 울먹이는 한국어로 "팬이 없는 나는 없습니다. 팀원이 없는 나는 없습니다. 가족이 없는 나는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니퍼트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관중석을 향해 큰 절을 올렸고 마운드에 입맞춤을 한 뒤 오픈카에 올라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며 팬들과 끝인사를 나눴다.

경기는 오후 7시 48분에 종료됐고 8시경부터 30분 가량 은퇴식이 진행됐다. 모든 행사가 마무리된 뒤에도 팬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고 니퍼트 또한 가족과 함께 조명이 꺼져 어두워질 때까지 그라운드에 머물렀다.

니퍼트는 거의 1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수백명의 팬들이 경기장 밖에서 니퍼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음에도 자신을 기다리는 팬들을 확인한 니퍼트는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구단 측의 만류로 사인과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지만 니퍼트는 모든 팬들과 빠짐없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성원에 보답하려 애썼다.

팬들 사이에선 "니퍼트 사랑해요", "니퍼트 존경합니다" 등 칭찬과 축복이 뒤섞인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니퍼트는 한참을 더 팬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차에 올라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구보다 팬들의 가슴에 강렬한 추억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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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근 | oranc317@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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