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최대주주 일가인 최윤범 회장 측은 소수주주 보호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재계 전반은 이 제도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한화와 LG 등 최 회장 우호세력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조차 "정관에 집중투표제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찬성에 부담을 느끼는 기류다.
집중투표제는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가 가진 주식 수 × 선임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함으로써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도입 취지는 소수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재계와 정부는 지배구조 불안정 및 외부 세력의 경영 개입 확대를 우려하며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는 "기업 지배구조 규제가 과도해지면 기업 가치 하락과 국부 유출 같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4년 10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추진하기에는 아직 여건 조성이 덜 됐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번 임시 주총에서 시선이 쏠리는 대목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 우호세력으로 꼽히는 한화와 LG의 표심이다. 두 그룹은 각각 7.75%, 1.89%(2024년 6월 말 기준)의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 중인데, 만약 이들이 집중투표제 도입안에 찬성표를 던진다면 "자신들도 정관에 집중투표제를 반영해야 하지 않느냐"는 요구가 거세질 수 있다.
한화는 특히 최근 한화오션을 그룹에 편입하며 지배구조 개편이 한창이다. 그 과정에서 집중투표제를 인정할 경우, 외부로부터 경영권 간섭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실제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 등 주요 계열사는 물론 그룹 지주사 격인 ㈜한화도 집중투표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LG화학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화나 LG 입장에선 고려아연 주총에서 찬성 표를 던졌다가 추후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잘 알 것"이라며 "최윤범 회장 측과의 우호관계 유지냐, 아니면 자사 정관과 주주정책의 일관성이냐를 두고 고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집중투표제 도입 자체가 논란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작 소수주주들이 혜택을 보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MBK파트너스는 올 1월 초 보도자료를 통해 "고려아연의 현재 지분 구조상 집중투표제를 도입해도 일반 소수주주가 후보를 올려 당선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MBK는 더 나아가 "소수주주 보호 제도라고 하지만, 기존 대주주나 우호 지분이 이미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상태에서 시행되면 실질적으로 소수주주가 이사의 자리를 확보할 여지가 거의 없다"며 "오히려 소수주주의 권리가 역으로 침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려아연은 "시민단체와 소액주주연대, 정치권까지 꾸준히 권장해온 집중투표제를 MBK만 반대하는 건 궤변"이라며 맞서고 있다. 다만, 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지분요건 문제나 실제 의결권 행사에서 소수주주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될 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고 있다.
최윤범 "경영권 방패" vs MBK "누구 위한 제도인가"
이번 임시 주총은 결국 최윤범 회장에게는 경영권 방어 카드를, 반대 진영에겐 '유명무실한 소수주주 보호 제도'라는 시비거리를 동시에 안긴 셈이다. 재계에서 "집중투표제를 가장 기피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로 민감한 사안인 만큼, 이번 표결이 성사된다면 파급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한화와 LG가 어떻게 투표에 임하느냐가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찬성한다면 자신들의 지배구조에도 불똥이 튈 수 있는 데다, 반대한다면 최윤범 회장과의 우호 관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23일 임시 주총 결과에 따라 기업 지배구조 논의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고 있다. 소수주주의 권리 강화를 표방한 '집중투표제'가 실제로 도입될지, 그 뒤 어떤 후폭풍이 불어 닥칠지 시장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