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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니버셜 픽쳐스 |
영화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헝가리 건축가 라즐로 토스가 아메리칸드림의 나라 미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유럽에선 인정받은 라즐로지만, 그의 경력은 미국 입성과 함께 초기화된다. 가난과 외로움, 유대인을 향한 보이지 않는 편견이 라즐로를 포박한다.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라즐로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자본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으로부터 대규모 문화센터를 지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 해리슨은 라즐로를 후원하는 한편, 동유럽에 남겨진 그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과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도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돕는다. 순조로운 듯 보였던 라즐로의 여정은 그러나, 자본의 힘과 차별 속에서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의 삶을 따라가며 20세기 미국 이민자의 삶을 스크린에 호출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감동과 눈물의 성공 스토리로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가 주목한 건 라즐로로 대변되는 예술가의 열정과, 해리슨으로 은유되는 미국 자본주의의 충돌이다. 그리고 희망을 찾아 새로운 땅으로 왔지만, 새로운 땅에서마저 착취당하는 이민자의 부서지는 내면이다. 재료 그대로를 노출하는 브루탈리즘 양식처럼, 영화는 인물의 모난 부분까지도 가감 없이 찍고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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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니버셜 픽쳐스 |
영화를 보는 내내 기묘하고도 불편한 기류를 느낀다면, 그건 라즐로와 해리슨 사이를 오가는 힘의 역학 관계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겉으로는 친절한 척 베풀면서 은연중에 '내가 너보다 위에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해리슨의 이중성에서 기인한다.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건네는 말 곳곳엔 권력의 칼이 숨어있다. 비아냥도 섞여 있다. 건축가의 자부심이 자본의 힘 앞에서 위협받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아메리칸드림의 모순과 실체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해리슨의 멸시와 건축을 '돈의 논리'로만 대하는 사람들의 짓밟힘과 자신의 건축에 딴죽을 거는 마음 주민들 사이에서 라즐로는 버틴다. 그리고 더욱더 건축에 집착한다. 그에게 문화 센터 건축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돼 버린 자신의 마음을 재건-복원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밟아온 삶의 연혁과 트라우마를 건축 양식에 결합시킨 연출의 묘가 상당하다.
러닝타임, 무려 3시간 35분(215분).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진짜 겁먹어야 할 영화는 90분짜리를 3시간처럼 느끼게 하는 지루한 영화들이다. '브루탈리스트'는 반대다. 상영 시간 대비 체감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여기엔 쉼표 역할을 해주는 '인터미션'이 적잖은 역할을 한다. 코베 감독은 '1부(도착의 수수께끼)'와 '2부(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 사이에 15분의 인터미션을 삽입했다.(인터미션 뺀 본 상영시간 2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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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니버셜 픽쳐스 |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2023년, 206분) 등을 상기했을 때, 인터미션 없이 한 번에 달려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넣었다는 건, 감독이 인터미션을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형식의 일부'로 적극 활용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코베 감독은 "이것은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는 인터미션"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터미션 동안 스크린에 띄워지는 사진 한 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즐로로 분한 애드리언 브로딘의 연기는 '부르탈리스트'의 척추다. 유대인 학살 공포 속에서 예술혼을 꽃피운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 이야기를 그린 '피아니스트'(2003년)로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 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 애드리언 브로딘은 이번엔 전쟁의 트라우마를 건축 예술로 승화시킨 라즐로를 연기해 각종 시상식을 종횡무진 중이다. 길고 곧게 뻗은 앙상한 몸, 겁을 잔뜩 먹은 듯한 두 눈을 지닌 이 배우를 통해 라즐로 토스는 흡사 실존 인물과도 같은 생명력을 얻었다.
참고로 애드리언 브로디의 아버지는 폴라드계 유대인, 어머니는 헝가리계 유대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 스필만이 음악으로 학살의 공포를 이겨내고, (헝가리계 유대인) 라즐로가 건축으로 투쟁을 이어 나갔다면, (그들을 뿌리로 둔) 애드리언 브로딘은 연기로 자신의 조상들이 겪는 아픔을 위로하는 셈이다. 예술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