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만장일치 MVP' 상상했던 엔딩인데, 여제는 패자를 떠올렸다 '끝까지 남달랐던 품격'

인천=안호근 기자 / 입력 : 2025.04.0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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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 김연경이 8일 우승 후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흥국생명 김연경이 8일 우승 후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패배를 하니까..."

누구보다 많은 상대를 굴복시켜온 '배구 여제'지만 마지막 순간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김연경(37·인천 흥국생명)은 아름다운 조연이 된 대전 정관장을 떠올렸다.


김연경은 8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열린 대전 정관장과 도드람 2024~2025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5전 3선승제) 5차전에서 블로킹 7개와 서브에이스 하나 포함 34득점, 공격 성공률 42.62%로 맹활약하며 풀세트 접전 끝에 흥국생명에 통산 5번째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챔프전 최우수선수(MVP)는 전체 31표를 싹쓸이한 김연경의 차지였다. 만장일치 수상은 역대 단 2번째 기록이었다. 4번째 흥국생명에 우승을 안긴 그는 4번 모두 챔프전 MVP를 수상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지만 현실이 아니길 바랐던 은퇴였으나 김연경은 시즌 막판 직접 은퇴 의사를 밝혔고 일찌감치 '라스트 댄스'를 준비했다.


데뷔와 함께 팀에 우승을 안기며 신인왕과 정규리그와 챔프전 MVP를 모두 석권했던 김연경은 세 차례 팀을 정상에 올려놓은 뒤 세계 무대로 발을 뻗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로서 성장한 그는 2020~2021시즌을 비롯해 지난 두 시즌 모두 준우승이라는 뼈아픈 기억을 남겼다. 그렇기에 여제의 마지막은 무조건 우승이어야 했다.

흥국생명 선수들이 김연경을 헹가래치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흥국생명 선수들이 김연경을 헹가래치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마지막 힘을 다 끌어냈다. 1차전 공격 성공률 60.87%로 16득점, 셧아웃 승리를 견인한 김연경은 2차전부터 이어진 4연속 풀세트 접전 속에서도 지치는 기색 없이 훨훨 날았다. 4경기 평균 29.25점을 올렸고 커리어 마지막 경기였던 이날은 블로킹을 무려 7개나 잡아내며 34점을 폭발했다.

몸을 내던지는 환상적인 수비로도 힘을 보탰다. 고희진 정관장 감독이 "김연경의 몸을 던지는 수비 하나가 우승을 만들어냈다"고 했을 정도였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 또한 "언제나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5세트에서 보여준 대단한 수비는 이 선수가 얼마나 우승을 하고 싶었고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보여줬다"며 "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이었다. 첫해와 마찬가지로 팀에 우승을 안겼고 이견 없는 MVP를 차지하며 커리어의 시작과 끝을 놀랍도록 똑같이 마무리했다. 그야말로 박수칠 때 떠날 수 있게 됐다.

2년 전 리버스 스윕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김연경은 "너무 큰 어려움이었고 '은퇴를 앞두고 또 나한테 역경이 다가 오는구나' 생각하면서 계속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화합하려고 얘기도 많이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선수단 너무 고생했다"며 "멋진 마무리를 시켜줘서 너무 고맙다"고 전했다.

그만큼 간절했고 힘겨웠고 그래서 짜릿했다. "한국에 돌아와 4번의 결승을 했는데 '별 하나 다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라고 생각을 최근에 많이 했다. 3,4차전 끝나고 뭐가 문젠가 생각했고 '열심히했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게 이것뿐이지' 했는데 5차전 왔을땐 마음이 편해졌다"는 김연경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선수들도 홈이기에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나 영화도 이런 시나리오를 짜진 못할 것이다. 너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확히도 김연경이 너무도 바랐던 은퇴의 그림이었다. 그는 "원래 원했던 모습으로 은퇴를 하게 됐다"며 "아직까지 많은 분들이 정상에 있고 잘하는데 왜 은퇴를 하냐고 하시는데 이게 내가 상상한 은퇴의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눈물도 흘렸다는 그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오늘이 참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연경(오른쪽)이 우승 후 정관장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김연경(오른쪽)이 우승 후 정관장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진경 대기자
그러나 여제는 생애 최고의 순간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까지 잘 겪어보지 못했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2승 2패가 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스포츠엔 비기는 게 없지 않나. 누군가 승리하면 누군가는 패배를 하니까 그게 신경이 쓰이더라"라며 "정관장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우리가 마지막에 웃게 되니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관장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자신이 너무도 간절했던 우승이었기에 그만큼 상대로 같은 목표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를 떠나는 김연경이 마지막 순간의 느낀 패자에 대한 배려였다.

지긋지긋할 만한 배구다. 프로 생활만 20년 가까이 했다. 다시 배구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김연경은 "안하고 싶기는 하다. 이 직업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3차전에 끝났으면 이런 생각을 안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되는구나' 했을 수도 있다"면서도 "어렵게 우승을 하면서 지금까지 배구를 했지만 참 쉽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마지막까지 날 쉽게 보내주지 않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는 걸로는 하겠지만 쉽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애주가로서 그동안 참아왔던 걸 동료들과 회식을 하면서 풀고 싶다는 그는 향후 진로에 대한 구상도 전했다. "김연경 재단이 있는데 올해 많은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며 "특별한 걸 한다기보다는 쉬면서 뭘 하면 좋을까, 내가 원하는 방향이 뭘까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구를 내려놓은 만큼 당분간은 쉬면서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겠다고도 했다.

가족들이 있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김연경은 끝으로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팬들이 많이 우셨다. 오늘도 많이 와서 응원해주셨기에 마지막에도 힘내서 이길 수 있었다"며 "저와 같이 나이를 들어가는 팬들도 있고 런던, 리우, 도쿄 올림픽, 그 다음에 유입된 팬들도, 최근에 생긴 팬들도 계신데 많은 분들의 에너지를 받아 배구 인생을 살았고 그래서 더욱 더 정상에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은퇴하더라도 배구나 다른 일들을 할테니 끝까지 관심가져주시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김연경이 우승 후 수훈 선수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김연경이 우승 후 수훈 선수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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